곰팡이展

20100731-20100828

작은공간 이소

 

 

밍군이 심혈(?)을 기울인 곰팡이展 2인전이 대구 작은 공간 이소에서 오픈했다.

 

계명대학교 대명 캠퍼스 앞, 지하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공간 이소.

계명대학교 졸업생인 황현호씨가 약 2년전부터 홀로 운영해오고 있다.

본인의 삶도 넉넉치 않은데, 미술인들을 위한 공간을

어렵게 어렵게 꾸려가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존경스럽다.

 

 

전시장 벽에 피운 곰팡이들. 비닐을 걷기 전.

비닐을 걷지 말고 사람들이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 있었지만....

 

 

결국 비닐을 걷었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말은 없지만,

일단 곰팡이들인지라, 관객들이 영 접근하지를 못한다.

 

 

 

벽에 그려진(?) 곰팡이들.

 

 

 

이준용 작가와 밍 작가.

이준용 작가는 해골모형에 피운 곰팡이와,

곰팡이로 만든 우리나라 지도를 전시했다.

 

 

 

밍 작가의 생각하는 사람.

세 부분으로 나눠서 트렁크에 넣고 이동했는데,

이동하는 중 곰팡이가 확 번져서 놀랬더랬다.

약 일주일 전엔 하얀 밀가루 반죽에 불과했던 것.

 

 

 

이렇게 빨리 많이 자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곰팡이의 번식력에 새삼 놀라울 뿐.

(이 모습을 보고 집에 가서 작업실을 아주 대청소를 했다)

 

 

 

전시장 풍경.

 

기획자(겸 운영자 겸, 청소부 겸, 등등..)인 황형호씨가 말했던 대로 '품(品)'을 넘어서,

곰팡이 그 자체가 확 다가오는 공간으로 꾸며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밍군의 개인적인 고민들 사이로, 생각하는 사람 위로 침식해가는 곰팡이들에서

복잡히 얽어진 치유와 침식, 재생의 과정이 잡힐듯말듯 그려지는듯 하다.

 

 

 

 

 

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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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e On Asia 2010

Single Channel Video Art Festival

 

20100408-20100510(30일까지 연장)

대안공간 루프

 

이런 저런 일때문에 홍대 앞을 자주 찾긴 했지만,

여유롭게 홍대앞을 거닌 것은 무척 오래간 만인듯했다.

네오록을 뒤적거리다가 홍대앞 대안 공간 루프라는 글을 보고,

'엥? 언제 구기동에서 홍대로 왔지?' 라고 생각했으나...

구기동의 대안공간 풀과 착각한 것이었다.

 

 

일단 외관은 대안공간이란 말이 무색하리만치 멋진(?) 건물.

 

 

 

왠지 리움이 연상되는 실내...

 

 

Move on Asia 2010 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중국, 일본, 필리핀, 베트남, 인도 등지의

작가들의 단채널 영상 작업이 선보이고 있었다.

 

감히 영상 작업들의 분류(?)를 하자면 크게 '쌩쑈 or 뻘짓'과 '그래픽' 정도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개인적으로는 전자쪽이 마음에 좀 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예를들면, 엘리베이터 정면으로 카메라를 세워두고,

버튼을 눌러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의 사람들의 표정을 기록한다던가,

 

야외의 물웅덩이(or 작은 호수?)에 가득 목욕 거품을 채워놓고 허우적 거린다던가....

 

겨울날 한강 한 가운데에 비키니 차림의 여인이 썬탠을 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한다던가 하는....

 

 

'그래픽'쪽은 아이디어들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영상이 진행될수록 '쓸데없는 오바'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를테면 지나치게 시간을 끈다던가, 아주 단순한 것에서부터 좀 더 복잡한 것으로

영상이 확장되어 갈때 좀 오버스럽다던가, 혹은 굳이 빨리돌리거나 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되었을 영상을 빨리 감아버린다거나 하는...)

 

내가 굳이 평할 깜냥은 안되고...평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취향으로 따지자면 그렇다는 이야기.

 

근 3-4개월 만에 갤러리 나들이인 까닭에,

왠지 영감이 충만해서 온 느낌도 들고..

평소같으면 대체로 지루했을 법한 영상 작업들인데,

무척 신나게 보고 온 것 같다.

 

 

 

ps. 브로셔는 왜 영문으로 들고온걸까..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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揮景: 휘경, 사라지는 풍경

20090918-20091008

통의동 보안여관

 

(이하 모든 이미지 출처는 neolook.com입니다)

 

 

 

  경복궁 옆길, 대림미술관, 진 아트 갤러리 등 제법 번듯한 건물이 늘어선 길 끝 코너에 누추한 건물이

두 개 보이는데, 하나는 브레인 팩토리 이고, 또 하나는 보안여관이다. 과거 서정주가 머물며 집필활동을

하기도 했다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보안 여관은,  일맥문화재단의 부설 연구소인 (주)메타로그 아트서비스

에 의해서 복합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첫번째 행사로 건물의 앙상한 뼈대

가운데서, 휘경동의 재개발을 주제로 하는 휘경, 사라지는 풍경展이 열렸다.

 

 

 휘경동 인근에 작업실을 얻었거나, 거주중인 작가 6명 강지호, 권용주, 김주리, 김태균, 김형관, 신은경은

2008년부터 동네의 재개발을 소재로 작업을 진행하고, 공공미술 프로젝트 <어디 사시나요?>를 진행했다.

이들은 300여명이 넘는 이웃들을 만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하고, 외대역 앞에서 퍼포먼스를 벌이는 등,

작업실을 떠나 집단적인 예술의 완성을 이루어갔다고 한다.

 

 

 재개발 정책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용산참사를 비롯해서, 전국이 재개발로 들썩이는 까닭에,

주위를 둘러보면 심심치 않게, 재개발을 내용으로 하는 예술 작업들을 만나볼 수 있다. 나 또한 예술이라긴

뭐하지만, 돌탑을 쌓아올리는 중이니까..., 한데, 이런 개인적인 작업들의 한계는 명백한데, 그 행위로 해서

직접적인 변화나 사회적인 결과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현장의 당사자들에게는 어떤 보탬 혹은

영향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개인적인 '감상'차원에서, 재개발이라는 소재를 '사용'

하고 있을 뿐이다.

 강홍구-은평뉴타운에관한 어떤 기록

Dream  House - 안규철/최원준 등

 

(물론 갤러리를 찾은 관객들, 언론에의 소개로 나타나는 2차적인 영향은 짚어 볼만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꼭 작업이 아니라도, 개별적으로 당사자들에게 보탬이 될만한 일을 하시는 분들이 많다. 최소한의변화를 위한 사진, 달력 참고. 위 링크의 작가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의도가 절대 아님을 노파심에 부연한다.)

 

 

그런 측면에서 직접 현장에서 주민들을 만나 당사자들의 행위를 예술의 전면으로 부각시켰다는 것 만으로도, 이들 6명의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시사하는 바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ps. 6명의 작가가 너무나도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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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_net Asia 2009

아시아 현대미술 프로젝트

20090930-20091122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2-3F

 

 

"<아시아 현대미술 프로젝트 City_net Asia 2009>展은 아시아 현대 미술의 현주소를 점검하고

아시아 미술의 미래와 발전 가능성을 모색해 봄으로써, 현대 미술에서 아시아 미술의 위상을

확립하고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하는 격년제 현대미술 프로젝트이다."

    전시 소개 글 중에서..

 

서울 시립미술관, 이스탄불 현대미술관, 동경 모리미술관, 복경 금일미술관이 각각

양날의 검, 새로운 대륙 이스탄불, 오프 센터, 퇴적작용이라는 타이틀로 섹션을 나누어

도시별로 전시를 진행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김종구, 최수앙, 이명호 등 유명세를 탄 작가들이 대거 출품하였는데,

각각의 작업이 지나치게 구획이 나누어져 있는 탓에, 너른 공간에 작품이 흩어져있는

느낌을 주는 데다, 과연 이 작업들이 기획의도에 적힌 대로 "한국 현대사회에 자리하는 정치,

문화적 이슈들을 날카롭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들었다.

 

이를테면 이병호는 이전 작업들로 볼때 직접적인 시대 현실을 주제로 한다기 보다는

물질의 변화, 혹은 순환을 통해 삶을 고찰한다는 측면이 강하고,

최수앙의 경우도 구체적인 시대 상황보다는 다소 개괄적인 측면에서 사회로의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명호의 경우는 가장 생뚱 맞은데, 애초에 미학적인 관점에서 시작된 작업인 까닭에,

어떻게 해도 한국현대사회의 이슈들과는 관련을 짓기가 어려워보인다.

 

백번 양보를 해서, 한국의 현대사회라는 것이 이젠 어느정도 궤도에 올라 있으며,

과거의 치열했던 외적인 이슈들은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사실 절대 인정할 수 없지만!)

이제는 개인화된 내적 이슈 혹은 보편적인 문제들이 예술작품의 주제로서 드러나고 있다는 전제하에

작업이 선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작업들이 그런 문제의식을 관객에게 전달하기에

충분한지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이창원의 녹차 그림에서, 김종구의 철가루 그림에서

관객은 대체 어떤 문제의식을 떠올릴 수 있을까?)

 

결국 서울시립미술관측에서 내놓은 작업들은 한국현대사회의 이슈들을 다룬다기보다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질적인(유명세!?) 측면에서 "글로벌 스탠다드"를

지향하고 있다고 보이는데, 서울 섹션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정윤석의 설치 작업

<Video Kill the Radio Star>에서 그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게다가 코미디프로 라디오 스타때문에 더더욱)

익숙한 음악 Video Kill the Raido Star의 뮤직비디오인 정윤석의 작업은,

미국을 상징하는 만화 캐릭터들, 코카콜라 상표, 미국 영화의 전형적인 이미지들,

레이건 대통령의 사진, 베트남전, 냉전시대의 사진 등을 교차시켜 보여주는데,

중간에 잠깐씩 흘러가는 88올림픽 마스게임 영상들이 있긴 하지만,

내용에서나, 형식면에서나 전세계 누가 보아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글로벌 스탠다드의 전형이라 할만 하다.

 

쉬넬 오즈멘&amp;엘칸 오즈겐 &lt;테이트 모던으로 가는 길&gt;

할레 텐걀 &lt;횡단면&gt;

 

한편 이스탄불 섹션이 오히려 서울의 주제인 시대정신에 부합할만한 작업들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일단 절반정도의 작업들이 영상물인데다가, 섹션 어디서나 보이도록 크게 전시된 쟈난 세놀의

<마침내 당신이 내안에...>라는 설치 덕분에 비엔날레같은 분위기마저 들게했다.

 

쉐넬 오즈멘&엘칸 오즈겐의 <테이트모던으로 가는 길>은 돈키호테를 패러디한 영상으로,

터키의 현대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었고, 귤슨 카라무스타파의 <내면으로부터의 인식>은

어린시절의 가정 안에서의 기억과, 집 밖, 광장에서의 사건의 영상들을 재구성하고

교차시키면서, 개인에 비춰진 역사적 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할레 텐걀의 <횡단면>은 이스탄불에서의 삶을 독백하는 영상인데, 화자의 가족이

이스탄불에 이주해오게된 역사, 그리고 과거 오스만 시대에 이스탄불의 이주 역사,

그리고 오늘날 이스탄불에 모여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스탄불의 시작에서

오늘까지를 관통하는 '어떤 것'을 건드리고 있었다.

 

비록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현실과 역사,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지만,

비 서구권에서라면 어느곳이든 상당부분 공유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에,

이 곳 서울의 관람객인 내게 있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앞서 서울 섹션의 주제의식과 작품 선정이 더욱 아쉽게 느껴졌다.

 

타카히로 이와사키&lt;혼돈으로부터벗어나&gt;

타카히로 이와사키&lt;혼돈으로부터벗어나&gt;

 

도쿄 섹션은 브로셔에 소개된 대로, 확산, 증식, 축적 등의 방식의 작업들이 소개되고 있었는데,

일본작가들의 작업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어찌보면 정형화 되었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만큼

일본적인 시각요소-판화(우키요에)적인 평면성, 장식성, 그리고 오늘날의 망가(만화)까지-를

꾸준히 현대미술에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로서는 부러운 부분이 아닐수 없다.

 

 

중국, 베이징은 큼직큼직한 작업들을 선보이고 있었는데, 사진작업, 혹은 사진의 모사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사전검열이 여전히 존재하는 나라로서,

대외에 공개되는 중국의 미술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부정적인 느낌이 크기 때문에,

솔직히 베이징 섹션에 큰 관심을 갖고 보지는 않았다.

(아리랑 꽃씨展 글 참조)

 

 

아시아를 주제로 한 교류전의 성격을 띈 만큼, 각 지역의 특수성을 살펴보고, 또 그 안에서 아시아라는

 보편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전시의 기획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스탄불 섹션은 4개의 섹션 중 가장 빛을 발했다고 본다.

 또 같은 맥락에서, 서울 측은 지나치게 글로벌 스탠다드를 지향함으로서, 보여지는 측면의

 화려함은 이루었을지 모르지만, 정작 핵심적인 부분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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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윤 개인전 - <기억의 서 : K의 슬라이드>

20090924-20091011

브레인 팩토리

 

 

 지난 개인전 <Un-Vanished Memory>展에서 사람이 떠난 빈집에 놓여진 사물들을 스케치 하며,

그 공간을 소유했던 사람과, 물건들의 역사, 그리고 작가의 기억과, 관객의 기억의 모호한 중첩을

시도했던 것 처럼, 이번 <기억의 서: K의 슬라이드>展에서는 집 주변 공사현장에서 발견한

 400여장의 슬라이드 필름을 단서로, 역시 그것의 주인과, 작가와, 관객의 기억들을 짜집어 나간다.

 

  전시된 K씨의 흔적-편지, 엽서, 일기, 등을 살펴보며, K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 그 당시는

저랬을 법도 하겠구나, 무엇 때문에 한국에 왔을까, 저 곳에는 무슨 일로 찾아갔었을까, 이 사진에서

K씨는 누구였을까를 곰곰히 생각하며 K씨의 흔적에 젖어들다가, 문득 전시 소개글을 읽어보니

슬라이드를 제외한 모든 것은 작가에 의해 가공된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슬라이드의 이미지들마저,

작가에 의해 모호하게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에, 잠시 '헛' 하는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여기는 법원이나, 신문사가 아니라 갤러리라는 사실, 즉 내가 해야 할 게임은 '탐정 놀이'가 아니라

'기억 만들기'라는 것에 생각이 이르면서, 작가의 간극 매꾸기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보기로 한다.

40여년전 K씨의 기억과 오늘의 나 사이의 간극이, 작가의 상상력과 기억으로 해서, 과연 어떠한 형태로

매꾸어질 것인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듯 싶다.

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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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토요일 아트 선재에서, 계원조형예술대학교의 주최로
 사진, 미디어, 자본주의라는 키워드를 놓고, 프랑스 제8대학에서 오신 석학들과의 학술대회가 있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종일 진행되었지만, 나는 결혼식이 오전에 있는 바람에,
2시경부터 들어가 주형일 교수의 <디지털 시대의 사진: 대중 예술의 가능성과 한계>라는
발제글부터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이렇다 저렇다 평할 짬은 안되지만, 간략히 소개/느낌을 적어보자면,

 주형일, <디지털 시대의 사진: 대중 예술의 가능성과 한계>
 - 대중에 속한 사람으로서, 사실 가장 관심이 가는 주제였는데, 다소 논의를 극단적으로 몰아가는 듯 했다.
 인터넷의 블로그를 사용하는 행위는 자본이 좋아하는 아주 착한 자발적인 무보수 노동자에 비해진다는 것,
 공동체(즉, 세력)를 형성해서 인터넷을 소유한 자본들에 대항할 수 있다는 의견 제시나,
 이미지의 무한 복제를 통한 저작권의 무력화, DDOS를 연상시키는 사이트 공격 등의 극단적인 대안은
 어쩔 수 없이 자본과 공생해야 하는 절대다수의 대중들에게 요구하기는 (발제자도 인정했다시피)
 무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의 시간의 이영준 교수 말마따나, 자본을 어떻게 공격할 것인가보다는
 자본에 이용당하는 것을 어떻게 피할 것이냐가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까.

 쥘리앙 세레쥬, <자본주의의 사진적 재현에 관하여: 도시와 일상>
 - 자본주의를 어떻게 사진으로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 논의를 발전시켜 나갔는데,
 결과적으로 '일상성'으로 초점이 모여지는 듯 했다. 하나로 정의할 수 없고, 계속 변화해 나가며,
 복잡한 양상들이 얽혀있는 것이기 때문에, 도시의 외부에서, 내부에서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을 수 있고,
 또 그곳에서 일어나는 굉장히 지엽적이라고 보이는 일상적인 것들이 바로 도시의 모든 것 일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혹은 반대로 말하면 도처에 존재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말미에 Eric Sadin의 문화분석적인 사진을 모범예(?)로 제시했다.
 한데, 저기서 도시나, 자본주의를 빼고 '삶'을 넣어도 말이 그대로 될 것 같다. 결국 우리의 삶이
 자본주의의 삶, 도시의 삶이기 때문일까?
 (참고로 본문과 상관은 없지만 쥘리앙 세레쥬의 아내는 한국 사람이라고 한다.)

  서동진, <생명의 이미지, 자본의 이미지>
 -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CT, MRI의 의학영상에서 부터, 첨단의 의학영상분야까지 소개를 하면서,
 인체를 투명하게 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 그리고 그것들이 점차 병의 진단을 넘어서서 병의 확률을 이야기 하며
 의료행위와 그 영상들을 자본종속적으로 변화시켜 간다는 이야기. 달변과 신선한 주제로 흥미로웠다.

 박상우, <사진 복제를 통한 개인의 식별>
 - 용의자 검거에 사진이 도입되기까지의 역사적인 설명과, 그 사진들의 복제되기까지의 과정들.
후반부는 주로 프랑스 경시청의 베르티용(최초로 사진을 용의자 수사에 도입했음)의 노력에 촛점이 맞춰졌다.
 발표하느라 진땀은 빼셨는데, 다소 발표 스킬이 부족하셨던듯..^^;





 

ps.1 발제글들이 수록된 자료집을 사고 싶었지만, 품절인 관계로, 연락처만 적어놓고 왔다.
내가 듣지 못한 앞서 발제글중, 프랑스와 슐라쥬의 <사진, 미디어, 자본주의적 관계의 관계들>은
번역도, 통역도 난해했다는 이야기들이 들리는 것 같다.

ps.2 장내에 들어서면서 놀랐던 것은, 대략 2/3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청중. 연령대도 다양한듯 했다.
이렇게 많은 여성 예술(or 미학)인구에 비해..두각을 드러내는 이는 상대적으로 남성이 많으니..음...
뒤에 앉아 있던 두 여자분은 통역기를 귀에 붙였다 땠다 하며, "통역이 너무한데? 이렇게 빼먹어도 되나?"
를 연발하고 있었는데..그저 부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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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작가 2009 서용선
20090703-20090920

아리랑 꽃씨
20090717-20090927

국립현대미술관



 간만의 국립현대 미술관 나들이.

 올해의 작가 <서용선>展과   일본/러시아/중국 거주 한인 작가들을 소개하는 <아리랑 꽃씨>展을 보았다.
서용선 작가는 1980년대 소나무 연작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여, 이어서 단종의 폐위를 다룬 역사화와
도시인들의 군상을 다룬 작업들을 진행해 오고 있는데, 위의 도록에서도 느껴지듯 강렬한 색채와
과감한 선이 인상적이다.  2미터가 넘는 대형 캔버스에 과감하게 쓰여진 색채와 검은 선들, 그리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들은 막 분출될 것만 같은 억눌린 꿈틀거림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준다.

 작가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지 못했다라는 부채'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계유정란(세조가 단종을 폐위시킨 사건)을 다룬 역사화와 당시 1980년대의 정치적 상황은 그의 그림이
단순히 역사화를 넘어 시사하는 바가 있음을 암시한다. 자화상에 나타난 굳은 표정과 붉고 날카로운
눈매는 이 땅에서 작가의 역할에 대한 고민과 사명감, 그리고 실천적, 현실참여적 작가로서 민중미술
계보의 연장선 상에서 파악될 수 있으리라 본다. (서용선 작가는 근래 철암의 폐광지역에서
철암그리기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매월 세째주 토요일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다만 도슨트의 설명을 비롯 리플렛의 내용 등 전시 전반에 걸쳐서 작품의 내용을 구체적인
시대의 현실보다는 보편적이거나 추상적인 현실 차원에서 파악하려는 노력들이 엿보였다.
(이를테면 부조리한 실존, 실존적 고통, 현대인의 불안한 내면....등등..)
물론 시대적인 상황이 변하고 있고, 또한 너른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 보편적인 부분에서의
공감도 중요하겠지만, 특히 이와 같은 작업에서 구체적인 시대 현실을 제거한다는 것은
작업의 의의를 반감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시절이 수상하여 그런가? 하는 괜한 생각조차 든다. 말많았던 MB코드 인사
국립현대미술관장 배순훈 관장덕에 말이다.)


<아리랑 꽃씨>展은 일본/중국/러시아에 거주중인 1/2/3세대 한인 작가들을 소개하는 자리인데,
전시 자체보다는 전시 중에 벌어진 사건이 흥미로워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 1세대 한인 작가 한락연을 소개하는 코너였는데, 작품 철거를 알리는 패널만이 존재할 뿐,
벽에 남은 못자국만이 작품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소장처의 특별한 사정으로 작품을 공개하지 못하게 되었음"이라는데,
특별한 사정인 즉슨, 지난 7월 5일 신장 위구르자치구의 소수민족 유혈사태로 바짝 긴장한 중국정부가
"소수민족이 모일만한 장소는 사전 차단하라" 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따라서, 혹시나 1세대 한인
작가의 작품앞에 모여들 한민족들을 걱정하여 작품을 철수시켰다는 것이다. '혹시나'겠지만,
예술이 하나의 사안에 대해 구심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에 주시하고 있는 중국정부의 반응도
예술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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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실 - Neutral Space
대안공간풀
20090130 - 20090210

모리스 두와
가나아트스페이스
20090204-20090210

주명덕 사진 I - 도시정경
대림미술관
20081126-20090208(연장전시중)





이은실 - Neutral Space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과천 국립현대 미술관의 젊은 모색전에도 참가했던 동양화단의 이단아.
오픈된 전통 가옥들과 구름속의 풍경들, 그리고 털들...털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를 인용해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로 아닐까 싶다.




모리스 두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얼핏 단편화된 시각의 모음 같아 보인다는 점에서 큐비즘과 맥을 같이하는 듯도 보이지만,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시점의 분화보다는 시간의 분화, 혹은 주인공을 둘러싼 '아우라'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어떻게 그렸을고 고민해보니, 구체적인 형상을 그린 후, 선을 그어 주변 공간을 나누고
비슷한 색으로 칠하는 식으로, 그다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떤 개념이나 철학보다는 시각적인 신선함에서 의의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상대적으로 짧은 전시기간과 도록의 부실한 서문(그리고 프랑스 관(官)차원에서 작성된)으로 볼때,
한국 미술 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적 성격의 전시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새로운 시각 보다는 '개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영/미/독일권 미술에 비해 프랑스는 시각적인 신선함에
관대한 것 같다는 밍군의 말. 그래서 화가들이 프랑스에 가면 숨통이 트인다나 뭐라나...



주명덕 사진 I - 도시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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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더 이상 사진은 다큐멘터리에 적합하지 않아. 비디오 캠코더를 들고서 영상으로 보여주는 게
사진보다 훨씬 빠르고 효과적이지" (주명덕의 인터뷰 中)
"이제 우리 주변의 개인적인 것들을 기록하자" (존 사우스키의 뉴다큐멘트展 서문中)

 오늘날 전통적인 다큐멘터리는 예술과 영합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듯 한데, 한국 다큐 사진작가중
그 흐름에 가장 충실히 몸담고 있는 사람 중 한명이 바로 주명덕이 아닐까 싶다.
서문의 표현을 빌면 '작가의 도시를 향한 시선과 미학이 담긴 사진'으로, 도시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는데,
대체로 광고판들을 빌어 소비의 아이콘을 제시하거나, 건물사이의 공간들을 통해 도시 풍경을 낯설게하기를
시도하고 있다.  
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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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개의 끓는 점
이소/이현민/이혜인/정혜진/허남준
20090114 - 20090201

이예린 - After the Rain
갤러리 나우
20090128-20090203

김선회 - Finding Sun in the City
갤러리 룩스
20090128-20090210


아래 대화는 냐궁과 밍군의 전시 감상을 대화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다섯개의 끓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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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 전시 제목 그대로, 전혀 공통점이 없는 작업들인 것 같아.

냐궁: 아무래도 공모전 입상작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니까 전체적인 주제는 루즈할 수 밖에 없겠지.
개인적으로는 '이소'의 <순환하는 이야기>라는 작업이 마음에 드네. 익명의 편지돌리기라.....
일방적인 글쓰기라는 편지의 특성 때문에, 하나의 질문에 대해 관객들의 각각 다른 반응들이 재미있어.
한데..100원을 넣고 뽑기를 한다는 것이 재미는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포스트잇 붙여놓고
관객들이 글을 쓰는 것과 차이가 없을 것 같지 않아?

밍: 그렇게 한다면 아무래도 참여율이 저조하겠지. '뽑기'라는 것은 관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봐야할 것 같아. 정혜진씨의 작업은 무얼 말하려는지 너무 어렵지 않아?

이소,<순환하는 이야기>

이소,<순환하는 이야기>

이혜인, <Shelter-Boat>

이혜인, <Shelter-Boat>

정혜진, <토끼풀꽃과 실패>

정혜진, <토끼풀꽃과 실패>

냐궁: 동감이야. 석고로 토끼풀꽃을 만드는 것 보다 팝콘으로 해보는게 더 재미있이 않았을까?

밍: 팝콘 재미있겠다. 강냉이도 괜찮을 것 같아 잘 썩지도 않을테고...

냐궁: 이혜인씨 작업의 주제는 '변화'인가?

밍: 기억, 망각 등등까지 포함한다고 봐야겠지. 금번 시립미술관에서 진행한 '젊은모색'展의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할 거야. 공사 현장의 그림들은 구체적인 형태가 드러나서 그림의 맥락을
어느정도 짚어낼 수 있는데, 검은색으로 지우면서 나열식으로 표현한 그림들은 다소 접근이 어려운
느낌이 있네. 차라리 검은색으로 지우지 말고, 기억들을 레이어처럼 중첩해서 표현했으면 좋았을 것 같아.

냐궁: 허남준씨의 작업과, 그 작업하는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은, 전시론에는 어느정도 동감할 수
있지만, '손가는대로'식 작품론에는 개인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워.

밍: 뚜렷한 의도 없이 덧칠해지는 물감들..., 아마 학교에서라면, 교수님들의 호된 질타를 듣지 않았을까?
게다가 그림에 뿌려진 반짝이들과 바니쉬들은 팔리기 위해 준비된 상품과 같은 느낌을 주어서
거북한 느낌이 들었어.

냐궁: 이소씨의 작업이나 허남준씨의 작업에처럼 요즘 예술의 화두는 관객과의 '소통'일 것인데,
예술가의 설명을 보면 그럴듯 하긴 하지만, 왠지 그들만의 논리 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내 경우에 이소씨의 '익명 편지돌리기' 작업에 참여해서, 편지의 일방적인 성격이나, 하나의 질문에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다른 관객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지만, 단지 그 뿐이었어. 그냥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거야. 내가 참여함으로 해서 무언가 새로운 것,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단 말이지.

밍: 허남준씨의 퍼포먼스-관객은 구경하게 되는- 역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그냥 관객들은 구경할 뿐이지. 그것이 어떤 관객들의 행동이나 생각의 변화, 혹은 새로운 것들을
깨닫게 하지는 못하거든. 작가가 던지면, 관객들이 그냥 반응하는 수동적인 소통인 것이지.
어떻게 보면, 관객들입장에서는 오히려 불편하거나 혼란스러울 수 있을 것 같아.
수동적인 감상에 익숙해져 있는데, 갑자기 작가가 잘 알 수도 없는 작업들을 들고나와서
'소통'을 외치면서 관객에게 다가온단 말이지. 거기에 대해 수동적인 반응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그냥 반응일 뿐이지 '소통'이라고 이야기 하긴 어렵겠지.

냐궁: 어쩌면 지금의 '전시'-'감상' 으로 구성된 지금의 미술관 제도의 구조적인 한계일 것도 같아.
'소통'하면 관객이 참여해서 작업을 만들거나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어렵잖아.
조금 과격하게 이야기 하면, 미술관 벽을 부수는 작업에 관객이 참여해서 망치질을 한번씩 한다던가...

밍: 미술관이 잘도 좋아하겠네^^.


이예린 - After the Rain

이예린 <in Praha>

이예린 <in Praha>

뒤집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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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 거꾸로 뒤집어 보니...정말 평범한 사진이구나..

냐궁: 반영을 제외하고 흑백처리한 것 빼면...평범한 사진이야..
현실과 가상의 문제를 논하자는 건가? 그러기에도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데...

비온 후...비의 흔적이 보이는 시간의 세상..(중략).. 내가 가진 눈으로는 명확히 보이는,
내가 밟고 있는 이 세상, 그리고 잔바람이라도 불면 흔들리는 가녀린 자연의 액자와 그 여린
바람에도 흔들리고 있는 세상...(작업 노트 중)

밍: 작가의 말이 솔직해서 좋네..그리고 물결에 의한 미세한 떨림들도 보이긴 하니까...
영화 포스터 같은 느낌도 들고 거꾸로 죽 늘어놓으니까 시각적으로는 괜찮은 것도 같아.
뉴욕 미술사 교수가 적은 데카르트의 허상 현실 천재악마 등등의 말은 닭살스럽네.
굳이 그보다는 뉴욕이라는 국제적인 도시, 그 이미지에 대한 향수 등으로
이야기를 풀어보는게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냐궁: 그러게.. 개인적으론 이렇게 큰 사이즈로 인화할 거면 픽셀이 깨지지 않게끔
원본의 해상도에도 신경써줬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 아무리 대형 사진이 유행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깨지는 디테일은 안타까워...


김선회 - Finding Sun in the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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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궁: 사진마다 숨어있는 작가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정말 별로인 사진이 될 뻔 했어.

밍: 전시 서문을 읽지 않았다면, 작가가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갈 뻔 했어.
작가의 모습이 너무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아. 작가의 모습만이라도 칼라로 표시했으면 어땠을까.
그러고보니 '박현두'의 <Goodbye Stranger>작업이 생각나네. 역시 이국을 배경으로 한 자신의
 모습을 담은 작업인데, 이 작업보다는 분명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걸로 기억해.

박현두, <Goodbye Stranger>

박현두, 시리즈 중.


냐궁: 작가는 관광객도, 현지인도 아닌 경계의 상태인 자기의 모습과, 그런 자기에게 비추어진
무미건조한 도시의 모습을 담기 위해서 흑백으로 랜드마크들을 촬영한 것 같지만, 사진들이
너무나 '잘 찍은' 사진들이라서 무미건조하다는 느낌이 덜한 것 같아. 차라리 관광객들이 일반적으로
찍는 구도 - 다소 못찍은 듯한 연출이 자신의 경계상태를 더 잘 드러낼 수 있었을 것도 같아.
그리고 본인은 '자화상'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분명 누군가 찍어준 사진인데, 그렇다면
자화상이라기 보다는 포트레이트, 그리고 그 찍어준 사람에 대한 '소통'의 측면에 있어서
자신이 경계상태에서 '외롭다'라는 느낌은 반감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밍: 같은 맥락에서 이런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관광객처럼 사진을 찍는 것 보다는,
어떤 자기 주위의 공동체를 배경으로 대조적인 자신의 모습을 담는 것이 경계상태의
자신의 모습을 전달하는데 좀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런 경계의 상태..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장소나 문화의 문제라기 보다는
자신의 의지 문제 아닐까. 굳이 외국이 아니라도, 학교나, 회사 등 어떤 집단에
소속되기 시작할 때,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들 경험하게 되는것 같은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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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궁: 그런데 오늘 본 전시 중에서, 갤러리 그림손에서 있었던 15명의 단체전을 포함해서...
사진작업들이 모두 외국의 이미지-그것도 미국이나 유럽의 모습들인데...
이렇게 말해도 되나..'사대적'인 것 같은 느낌도 들어.

밍: 하긴, 그런 사진에 'XX 해물탕' 같은 간판이 들어있다면 왠지 갑자기 격이
확 떨어지는 느낌이 들 것 같기는 해. 앞서 이예린의 뉴욕 사진에서도 지적했지만,
국제적인 도시들의 이미지에 대한 향수도 사진을 감상하는데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아.

냐궁: 이런 사진들을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궁금해.
우리들이 가지는 느낌하고는 차이가 클 것 같은데..


 

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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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숙의 Shoeaholic "Dream Girls"
20090104-20090123
갤러리 토포하우스



 네오룩에서 현재 진행중인 전시를 뒤적거리다 눈에 확 들어온 '하이힐' 그림들.
여성성, 소비, 욕망 등의 선정적인(?) 키워드를 달고 있으니, 냐궁이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기에,
필름도 현상 맡길 겸, 갤러리도 돌아볼 겸 잠시 인사동에 나들이를 다녀왔다.

 전시장을 들어서자 100호, 혹은 그 이상의 커다란 캔버스에 가득찬 하이힐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바니쉬등의 처리 없이 붓질과 매트한 느낌, 색상 조합만으로 하이힐의 반짝이는 느낌을 낸 것을 보면,
작가의 필력이 범상치 않음은 느껴지는데...(표면이 무척 균일해서 처음엔 에어브러쉬로 작업한게 아닐까 했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시 스테이트 먼트와 그림을 번갈아 보며 스테이트먼트에서 강조한 '여성성'과 '욕망'에 대해 느껴보려 했으나,
아무래도 남자인 내게 '하이힐'을 보고 어떤 성정 상징이나 욕망을 느끼기는 무리인듯 했다.
아마 여성이라면 최소한 '가지고 싶다'정도는 느끼지 않았을까..


작업을 주욱 둘러보며 느낀 것은, 작가의 전략적인 모습이 무척 돋보이는 작업이라는 것.
스테이트먼트에 밝히고 있듯, 순수 예술과 광고 사이의 줄타기를 시도함으로써,
어설프게 순수 혹은 상업성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뒀고,
'하이힐'이라는 (아마도)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싶어하는 소재를 등장시킴으로서,
(혹은 남자라면 백화점에서 가격표를 보고 신발이 뭐이리 비싼가 하고 한번쯤 당황했을만한..)
관객 혹은 사회로의 열려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림의 장르가 '오브제'로서 누군가의 집에 부담없이 걸만한 내용과 형식을 취하고 있고,
 실제로 금강제화의 후원을 받아 몇몇 작품들은 핸드백에 프린트되어 각 매장에 홍보될 예정이라니,
 작가의 기민한 전략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다만 이왕 금강제화가 아닌 구찌라든가의 좀 더 고급
 브랜드였다면, '소유욕'이라는 측면에서 좀 더 보는 이를 자극할 수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렇듯 순수와 상업 사이에서 양자를 모두 취하는 전략을 보이고 있음에도,
개인적으로 보다 상업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까닭은,
작가가 '하이힐'로 드러내고자 하는 '여성성', '욕망', '소비'의 현상들이
그것들이 '왜?', '누구에 의해서?'라는 질문에는 외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까닭이다.

 굳이 '상업성'이나 줄타기에 대해서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예술가도 먹고 살아야지. 땅파서 돈나오는 것은 아니니까. 게다가 결국 현대 예술과 자본의 굴레에서는,
 균형잡힌 줄타기라는 것은 명성과 부를 동시에 가능케 하는 중요한 수단이니 말이다.
다만, 이 '드림걸스'의 줄타기는 다소 소심해 보인다. 다음 작업에서는 후원사를 당혹스럽게 하더라도
좀 더 과감한 줄타기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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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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