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A 미디어 아트 비엔날레 사전 프로그램인 The Village의
강연 프로그램 중 하나인 <공유지의 예술적 중얼거림>을 듣고 왔다.




강연은 파스칼 길렌(Pascal Gielen), 앤트워프대 교수.


강연은 사회에서 '문화'의 역할에서 시작한다.

문화의 주된 기능이란 구성원의 사회화(socialization)과 주체화(Subjectification)의

변증법적 작용이라는 것이 강의의 전체를 꿰는 큰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수십년간 문화의 사회화 기능이 지배적으로 발전해왔고,

이는 사회 구성원의 정체성의 동질화를 가져왔다.

결국 계층과 계급, 지역 출신 등의 고착화에 따라

최근 만연하고 있는 "Sensless Violence"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분석.


이는 정치인들이 주장하듯 단순히 "개인적"이거나 "윤리적"인 문제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 불평등의 분출이며, 문화의 역할이 축소된 데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문화의 역할이란 삶의 의미 부여의 가능성이고,

예술의 작동 메커니즘 - 의미부여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체계 - 이 유효한 지점이다.


Common이라는 개념을 주장하는데,

Creative Common License 같은 '공유' 혹은 '공동'의 개념을 생각하면 쉽다.

이것이 추구하는 바는 상시 타자와 마주할 수 있는 공적인 장소의 개념이다.


이하 내 의견...그리고 질문과 답변.


1.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한 방법이라면, 시민단체와 같은 직접적인 방법들도 있을텐데, 왜 굳이 예술인가?

- Consensus of Disconsensus (동의 하지 않음에 대한 동의)는 예술에서만 가능한 방법이다.


2. 주요 오픈소스 프로젝트처럼, 대기업이 '공유'를 표방하며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데?

- 현상적으로 맞다. 심지어 비판 이론(Critical Theory)조차도 상품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감시하고 지적하는 것이 답이다. False common의 예로 건대 앞 Common Ground를 예로 듬.


3.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지적도 있을 것 같다..

 - 모든 예술이 공동체 예술이 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회화와 주체화의 변증법은

   미적인 영역에서도 작동해야 하고, 각자의 방식, 각자의 목표에 맞도록 추구하면 된다.


4. 답변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예술이 common의 주요한 전략이 되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겟다.

자신의 전통에 반대하는 전통, 니체의 초인, 항상 새로워라 와 같은 모더니즘적 삶의 양태가 오히려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물론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예술적 형식의 차용이 가장 직관적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답변 중에 예술이 오늘날이 가지는 특수적인 지위를 이야기 하며 예술은 "Something Else"라는 언급을 했다.

과연 예술은 Something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다시 한번 고개를 든다.

위에서 언급하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면 반은 Something이고, 반은 Nothing이어야 한다는 아이러니.

(공동체 예술을 생각해보자. Susan Lacy나 Judy Chicago가 했던, 그것이 과연 Something인가? Nothing인가?)

시간관계상 질의자였던 신현진 선생님이 묻지 못햇던 부분이 있는데,

과연 위의 견지에서 예술 생산자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지, 과연 전문 예술 종사자가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

아마도 전체적인 맥락상, 비동의에 대한 동의, 혹은 사회화와 주체화의 변증법적인 방법론에

가장 익숙하고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예술가이니 그들이 당연히 앞에서 이끌어야 한다,

혹은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정도의 답변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덧. 의자를 어디서 구했는지 각양각색으로..

아마도 의도된 것 같다. 타자들과의 대면이라는.


덧. 40~50여명 모인 청강인원 중에 남자는 다섯명 남짓이었던 것 같다...

중간 쉬는 시간에 남자 화장실은 텅 비었는데, 여자 화장실은 줄이 늘어선 것을 보고 깨달았다.

예술 관련 (종사자든, 관심이 있는 사람이든) 인구성비가 이렇게 극단적인 것도

한번 살펴볼만한 주제인 것 같다.


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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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디쓴 커피를 왜 마시는지에 대한 고찰.
문화의 소비, 용인할 수 있는 정도, 지불을 감내할 수 있는 정도..
문화를 파는 사람들의 마인드. 소비하는 사람들의 마인드. 겉멋.
쏟아져 나온 사람들. 개성. 여자와 남자.
제품의 질. 문화의 질. 고급/저급문화. 환상. 사라짐. 덧없음. 생산성.
커피, 커피의 맛.


 지난 일요일, 손위 처남과 홍대에서 만났다.
<프리모바치오 바치>에서 쿠폰을 사용한 샐러드와 함께 스파게티와 피자를 먹고,
<커피 볶는 곰 다방>에서 쓰디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커피를 마셨다.
 
쓰디쓴 커피를 마시다가,
그리고 돌아오는 길 홍대를 천천히 거닐며,
홍대거리에 쏟아져 나온 수많은 사람들.
개성있는 인테리어와 익스테리어의 가게들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을 보다가
내어걸린 물건이나 음식들의 가격이 결코 싸지 않다고 한탄을 하다가
그렇다면은 이 사람들은 단순히 물건이나 음식의 상품이 아니라
분위기라든가, 문화라든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더불어 팔기에
그에 해당하는 값어치를 더 붙인 가격일 것인데..
나는 과연 어디까지 그 무형의 가치에 대해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무형의 가치를 파는 사람도 소비하는 사람도
그 가치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 것인지, 혹은 진정성이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그것이 정말 무언가 특별한지에 대한 의문.
그리고 나 또한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에 대해 굉장히 인색한 사람이라는 생각.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왜 원하는지에 대한 생각.


ps. 잘 쓰려고 했었는데 왜 두서없이 읊조린게 마음에 들까.


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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