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회화 vs 사진의 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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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정의가 애매하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같은 거장의 작품도 예술이고, '예술'이라는 단어가 있기 전에 그려졌던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도 예술이라 불러지고, 바로 이 순간, 강원도 노인이 그리는 모래로 그린 그림도 예술이라 일컬어지고, 청계천에 놓여진 생뚱맞은 플라스틱 소라모양 조형물도 예술이라고 불러진다. (개인적으로는 '예술가-직업적인 훈련을 받거나, 그 그룹에 인정받은 사람'에 의해 행해진 것이라고 정의내리고 있긴 하지만) 연일 소개되는 작품들이나,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예술 작품들을 보자면 '누구나 예술가', '그 무엇도 예술작품'이 되는 시대가 도래한 듯 하다.

 한편, '사진'이라는 매체도 예술의 견지에서 보자면 참으로 정체가 애매한 녀석인데, 사진 그 자체로 보자면 영상을 필름이나 디지털 등의 매체로 기록하는 장치이지만, 전문적인 훈련이 없이도(물론 전문적인 훈련이 무용하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셔터를 누르면 사진을 만들어 낼 수 있고, 대체 어디다 써먹을지 모르는(벽을,건물을 장식 하는 용도 이외에는?) 예술 작품과는 달리 보도, 일상의 기록-스냅, 상업 등과 같이 굳이 '예술'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며 (물론 이 중에서도 도대체 써먹을 데가 없는 사진들을 추려 -예술 사진-이라 분류하기도 한다), 예술의 장르에 사진을 편입함에 있어 기존 회화나, 조각등의 순수미술계에서의 미묘한 긴장감(물론 이러한 까닭에는 취미 사진 가들이 '예술한답시고' 나대는 연유도 큰듯 하다. 직업적인 예술가들이 보기엔 얼마나 같잖겠는가)을 보자면 대체 사진과 예술의 경계에 대한 의문이 떠오른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과, 과정을 살펴보는 책이 이토우 도시하루의 <사진과 회화>, 마리안네 케스팅의 <사진의 독재>이다.
 
 두 책 모두 사진의 출현에서 오늘날까지 시간을 따라 사진과 예술의 관계를 탐색하는 구성면에서는 비슷하나, <사진과 회화>는 제목처럼 회화와 원근법에 좀 더 비중을 두고 논지를 끌어나가는 반면, <사진의 독재>에서는 사진과 대립하는 대상으로 회화뿐 아니라, 문예작품을 포함시키고, 사실/자연주의, 현실의 모방의 관점에서 논의를 끌어나가고 있다.

 <사진과 회화>는 르네상스에 이르러 완성된 선원근법을 이상적인 자연의 모습을 목표로, 자연의 불완전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개념으로 파악하고, 이후 '사진적 시각'으로 불리는 부분적인 시각의 원근법으로 변모해 왔음을 제시한다. 즉, 사진의 발생 이전에 이미 예술에 '사진적 시각'이 존재해 왔으며, 따라서 사진은 '예술의 사생아'가 아니라, '예술의 적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회화가 이루고자 했던 목표를 단숨에 이뤄버린 사진을 회화(예술)는 어떻게든 배척할 수 밖에 없었으며, 보들레르의 표현을 빌어 인간 상상력의 고귀한 결과물인 회화는 보이는 것을 그대로 따라그리는 천박한 것(즉, 사진)이 아니라, 예술가의 상상력을 거쳐 자신만의 시각으로 이상화되어야 함을 목표로 함을 천명하였다. 따라서 '나는 천사를 보지 않았으므로 천사를 그릴 수 없다'라고 천명하며 극단적으로 시각적인 재현에 충실했던 쿠르베가 당시 살롱의 관계자들과 화가들에게 멸시를 받았던 것과 같은 이유로 사진은 예술의 적이 되었다.(아이러니 하게도, 화가들은 사진을 수집하고, 사진을 자료로 삼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때문에, 사진이 자신의 특성을 포기하고, 얼마든지 회화적인 표현이 가능함을 증명하려 했던 반동의 시기도 있었으나,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사진의 매체적 특성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일군의 작가들이 나타난다. (책에서는 데이비드 호크니 등이 언급된다.) 해서 책은 회화와 사진은 대립의 관계가 아닌 형제로서 파악되어야 함을 밝히며, 정(회화)-반(사진)-합(예술의 상승) 식의 다소 나이브한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 (20세기 초 사진과 회화의 관계를 밝히는데 뒤샹의 유작을 끌어들이고 있는데, 몇 번 읽어보아도 도저히 그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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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사진의 독재>는 그 제목과 <예술의 모방에서 그 압도에 이르기까지>라는 과격한 제목이 제시하듯, [예술의 종말]에 대해서 언급한다.

 19말-20초에 있어서 사진과 예술의 대립에서 나타나는 양상과 그 분석은 <사진과 회화>에서 나타난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예술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나가게 되고, '회화의 본질'과 같은 예술 자체를 주제로 삼는 예술들이 유행하게 된다. 보들레르, 카프카, 피란델로 등은 사진의 기술적 특징을 문제 삼아 사진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들을 제시하는데, 도구 의존적이며, 확대 재생산이 가능한, 강렬한 시각적 충격인 이 매체는 결과적으로 어떠한 것도 제시하지 않으며, 인간의 자율적 의지에 반하는 것이었다. 한편 사진은 사진대로, 기술적인 완성과 함께, 이러한 편견을 극복하고자 여러 시도를 하게 되는데, 앞서 언급했던 회화를 모방하는 사진등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라즐로 모흘리 나기나 로드첸코 등이 선보였던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는 새로운 시각, 극단적인 확대, 축소 사진,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하여 보여주는 등, 눈의 시각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며, 회화가 추구하고 있던 추상성을 따라잡는데에 이르렀다.

  회화는 회화대로, 사진을 극복하기 위하여 다양한 시도(추상과 같은)를 하게 되는데,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속담처럼, 사진을 피하기 위해 사진을 알아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20세기 중반 팝아트에 이르면, 아얘 사진적 시각을 그대로 도입하여 '소격-낯설게 하기'시킴으로서 사진을 극복(사실은 압도당함)하고자 하는데, 2차원적인 현실의 모사를 넘어 아얘 3차원적으로 (물론 완전 비 실용적인) 사물을 모방하는 작업(올덴버그 등의)들까지 등장하게 된다. 척 클로즈는 사진을 그대로 확대 모사했고,(그의 작품 앞에 서면 사진과 다른 것은 그 압도적인 크기뿐이다!) 퍼포먼스나, 행위, 대지 미술가(크리스토퍼, 조지&길버트 등등..)들은 등등은 자신의 작업들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이처럼 사진이라는 매체는 예술을 압도하기에 이르렀으며, 예술품의 복제와 보급-즉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의 상실-에 사진이 미친 영향을 고려한다면, 사진이 예술 전반에 미친 영향은 실로 예술을 종말로 이끌고 있다고도 할만하다.

 마리안네 케스팅은 말미에 이르러 현대의 예술의 위기(사진을 피해 달아나고자 했으나 실패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숨기지 않는데, 칸딘스키가 언급한 예술의 의미-'다양한 면모로 나타나는 다기능성'- 즉 무용하기 때문에 뭔가 있어보인다는 -를 인용하며 예술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만이 이 국면을 극복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2013년 1월 23일 추가

사진이 회화의 적자라는 주장은 91년 MOMA의 사진분과 큐레이터로 취임한 Peter Galassi 주장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1980년초 Peter Galassi가 조직한 <Before Photography: Painting and the Invention of Photography>전에서

Heinrich Schwarz의 영향을 받아 사진과 회화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Peter Galassi의 인터뷰를 참고.(naive youth한 시절의 이야기라고....ㅎㅎ)

http://lejournaldelaphotographie.com/entries/5566/peter-galassi-30-years-at-the-moma 
 

 

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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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밍밍 2008.07.10 17: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짝짝 애쓰셨어요. ㅋㅋㅋ(이런 답글~^^*)

  2. 냐궁 2013.11.26 08: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시 읽어보니 새롭네..-_- 난 퇴보한게 분명해...;
    피터 갈라시에 대한 사족은 언제 달았는지 기억에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