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달여의 한국일정을 마치고 인도로 돌아간다.

가족들은 좀 더 한국에서 볼일을 보기로 하고 혼자 돌아가는 여정에 부여받은 임무는 '책'

수하물 23kg 3개와 기내가방, 그리고 백팩까지 아이들 책으로 가득 채웠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마저 도는 한적한 출국장에서 

공항 라운지를 무료 입장하여 홀로 즐기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인도로 돌아간다는 긴장 때문인지 아릿한 아랫배를 의식해서 부담스럽지 않게 끼니를 하고

1시간 반여를 무엇으로 때울까 하다 가방 속의 책을 끄집어 냈다.

 

'The Giver(기억전달자)'

 

동명의 영화를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딱히 블로그에 글을 남기지 않은 것을 보면,

크게 임팩트는 없었던 모양이다.

 

책은 모든 것이 동질해진 미래의 어떤 사회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생의 시작에서 죽음까지 모든 것이 철저히 통제되고 계획하에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12세가 되면 본인의 적성에 따라 정해진 직군을 배속받는다.

직업을 배정하는 의식은 공동체에서 굉장히 의미있는 행사로 여겨지는데,

주인공 조너선은 무슨 일인지 직업을 배정받지 못하고 당황스러움과 수치심을 느낀다.

 

탑승시간까지는 20여분 남았지만, 라운지에서 게이트까지 제법 거리가 있던 걸 기억해서

여유있게 라운지를 나서기로 했다. 텅빈 라운지에 교대로 식사를 하는 종업원들을 뒤로하고,

리셉션의 안내원에게 목례를 하고 라운지를 나섰다. 

기내용 가방에 책이 제법 묵직하게 든 탓에 끌면서 손잡이가 망가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손목도 비틀리면서 아파오는 지라 무빙워크에 몸을 맡기고 천천히 게이트를 향해갔다.

내 뒤에 한눈에보아도 가방이 통통 튈만큼 가벼워보이는 사내가 있었는데, 나를 의식해서인지

무빙워크뒤에 한참을 서있다가, 이윽고 종종걸음으로 추월해갔다.  

 기종은 A350 neo, 좌석은 10D. 기내가방을 위로 올리는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듯 올리려 했으나,

아무래도 힘들어보였던 모양인지, 승무원이 도와주려 손을 댔다가 깜짝 놀라 눈이 마주쳤다.

겸연쩍인 미소를 지으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채 -그러면서 최대한 힘을주어- 선반을 닫았다.

  인도로 가는 길은 올때와 다르게 승무원들이 가벼운 복장으로 기내식까지 서비스를 해주었다.

 기내식이 없다고 생각하고 라운지에서 요기를 했건만, 주는걸 다 먹자니 아랫배가 불편해서

 기내식을 조금 남겼다. 

 아침에 콜밴을 타고 공항에 올땐 공항고속도에서 그렇게 졸리더니, 막상 비행기에선 피곤한듯 하면서

 딱히 눈붙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아 <포드 vs 페라리>를 시청하고 멍하니 기내 모니터의 지도를 쳐다보다

다시 책을 꺼내들었다.

 

  예상했겠지만, 그리고 영화를 보아서 알고 있었지만, 조너선은 "기억 보유자"가 되어 선대 기억보유자로부터

과거의 기억을 전달받아 기억하는 특별한 임무를 맡게 된다. 색과 소리, 음악에 대한 기억이 책에서 흥미롭게

나타나는데, 책속의 사회에서는 모든 차이를 부정하여 '색'과 '음'에 대한 개념을 지워버렸다. 조너선은 색에 대한

기억을 전수받고 나서야(그 이전에도 조금씩 보기는 했지만) 비로소 세상에 채워진 색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문득 아내와 잠깐 논쟁했었던 '문자매체' vs '시각매체'  떠올랐다. 당시 나는 영화 <Tenet>을 아내에게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었고, 시간의 역행과 순행의 합맞춤은 시각매체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역설했고,

아내는 책에서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핀잔을 주었더랬다. 색을 볼 수 없는 세상이라니, 그리고 그 안에서

부분적으로 색을 볼 수 있는 주인공이라니, 책은 참 쉽다. "모든 색이 동일하게 보이는 세상" 한마디면

그 복잡한 것들이 설명되어버리니 말이다. 작가가 구체적으로 시각적 이미지를 상상하며 글을 적어내렸을지,

아니면 개념적으로 색이 없는 세상을 선언했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외눈박이 세상에서 두눈을 뜬자는, 언제나 그렇듯 체제를 거부한다. 조너선과 선대 기억 전달자는 

공동체 사람들에게 과거의 기억을, 그리고 늘 있어왔지만 그들이 보지 못했던 세계를 보여주기로 결심한다.

기억전달자가 기억을 갖고 사라져야 그 기억이 공동체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설정으로,

조너선은 급히 새로운 세계-아니 계획된 세계의 테두리 밖-로 나아간다.

 

비행기위 현위치를 표시하는 지도를 보니  낯설은 그러나 낯익은 지명들이 스쳐간다. "Viz..", "Bogu.."

그렇게 큰 도시들이 아닌 것 같은데, 어떤 기준으로 지명을 표시해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이름이 주는 느낌은 분명하다.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는가 싶어 화장실에서 씨름을 해보았지만 별 성과는 없다.

책을 덮고 문득 인도의 '집'에 돌아가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머릿속에 떠올려보는데,

집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떠오르지가 않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수가 없다. 

승무원들은 귀항편을 대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방호복과 고글로 둘러싸고

흡사 외계로 향하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뱅갈루루에서 하이데라바드까지는 사정이 있어 회사 출장자(인도인)들과 함께 밤새 버스를 타야했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서 조금이라도 쉬고 업무를 보고싶은 내 마음과 다르게

고국 땅에 돌아와 마음이 푸근해보이는 현지인 친구들. 저녁을 먹고 가겠다 하여 한시간 남짓 출발이 늦어졌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어스름한 저녁 풍경. 왔구나 싶지만 또 낯설은 풍경들.

한국에서도 그랬더랬다. 그랬었나, 이랬었나 하는.

 

문득 옆자리에 앉은 직원에게 말을 건내 본다.

 

"한국에서도 내집이 아니라, 여행으로 다니다보니 편하지 않았고,

막상 인도에와서 보니 내 집이 잘 떠오르지 않아, 집에가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 세상에 내 집은 없는 느낌이네, 어디에도 속한 것 같지 않아"

 

알아들은 것인지, 자기 하고 싶은말만 하는지 다소 생뚱맞은 대답이 돌아온다.

 

"나는 한국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저녁을 직접 해먹을 수 있어서 아주 편하게 느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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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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