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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경쟁 (20세기 사진비평사)
리차드볼턴 | 김우룡 역
도서출판 눈빛



 흔히 '소통' 또는 '참여'로 이야기 되는 예술과 사회의 관계맺음은 언제나 뜨거운 감자이다.
많은 예술관련 비평서들이 그 관계맺음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정작 현실에서 모더니즘(즉, 자기지시적인 예술을 위한 예술)의 맹위는 유효하다.


 단시간내에 예술사에서 굳건한 위치를 차지한 '사진'의 경우도 이러한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까닭. 많은 사진가들이 자신의 작업이 '예술'과 구분되기를 바라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 하다.

 <의미의 경쟁>은 기본적으로 위의 질문-사진과 사회의 '관계맺음'에 대한 비평들의 모음이다.
 20세기 사진 비평사라는 부제에 걸맞게 <의미의 경쟁>은 사진이 미술관을 통해서
모더니즘 미학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시작해서, 예술 장르의 사진에 국한하지 않고,
광고, 언론, 다큐멘터리, 근대 경찰 사진에 이르기까지 사진이 어떻게 이용되어 왔으며,
그 사진에 존재하는 사회적, 역사적인 담론들과 과연 사진이 표방하는 진실이 무엇인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상당수가 논문으로 발표된 까닭에 쉽게 읽히는 글들이 아니며, 특히 동성애나, 중남미 혁명에
관한 글들은 문화적인 차이 등으로 해서 다소 접근이 난해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글들이 짚어내는 사진의 역사적, 계급적, 문화적 맥락과 날카로운 비평들은 마지막 장을
넘길때까지의 끈기와 인내에 충분히 보답을 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비교적 매끄러운 번역도 그 공로를 기릴 필요가 있다!)

 - 목차 -

미적 행위의 사회적 결과는 과연 무엇인가
-미술관과 도서관의 서로 다른 사진 인식 / 더글라스 크림프
-사진을 판결하는 자리 -뉴욕 현다미술관 / 크리스토퍼 필립스
(*스티글리츠와 사코우스키의 대결이 볼만하다)
-팩투라로부터 팩토그래피로 -사진에 있어서의 러시아 형식주의 / 벤저민 H.D. 부크로
(*서구 사진사에 밀려 역사속에 묻혀진 러시아 사진을 재조명하는 글로
  '생산주의'-사회참여라는 측면에서 흥미롭다)
-시각예술의 무장 해제: 무기로부터 스타일로 변천해 간 급진적 형식주의 / 애비게일 솔로몬-고도우

사진은 성별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 무엇이 전설을 만들었나: 짧고 슬픈 다이안 아버스의 삶 / 캐슬린 로드
- 어머니로서의 자연, 그리고 말보로 맨: 풍경사진의 문화적 의미에 대한 한 탐구 / 데보라 브라이트
- 그래픽을 통해 본 욕망의 우선 순위: 중산층 여성지의 현대화, 1919-1939 / 샐리 스타인
- 동성애의 맥락: 소수집단의 자기 표현에 관한 문제들 / 잔 지타 그로버

사진은 어떻게 국가와 계급의 이익에 부합하는가
- 기업 연감과 사진 / 캐롤 스콰이어즈
- 드러난 이데올로기와 숨은 이데올로기: 혁명의 두 이미지 / 에스터 패라다
- 미국 동부에서: 리차드 아베든 주식회사
(*최근 상업 사진가들의 예술사진 및 다큐 사진계의 진출이 활발한 우리의 현실과 절대 무관하지 않을듯한 글!)

사진적 진실의 정치학은 무엇인가
- 사진의 담론 공간들 / 로잘린드 크라우스
(*앗제의 사진은 과연 어떠한 진실을 담고 있는가?)
- 다큐멘터리 사진론: 그 속에서, 그 주변에서, 그리고 그 후에 / 마사 로슬러
(*다큐-타인의 삶을 담는다는 것은 과연 어떠한 담론 속에서 움직이는가!)
- 몸과 아카이브 / 앨런 세큘러
(*초기 사진사에서 가장 큰 업적이면서도, 정작 사진사에서는 소외받는 경찰/기록 사진에 대한 논의!)


ps. 사진 관련 비평 서적을 읽을 때 마다 점점 사진 한 장 남기기가 힘들어지는 듯 하다.
    사진에 대해 탁월한 비평을 남긴 수잔 손탁도, 그래서 평생 사진을 찍지 않았던게 아닐까.


 


 

Posted by 냐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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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사진의 현재 (Art Photography Now)
수잔 브라이트 지음 / 이주형 역
월간사진 출판사


어딘가에서 강력 추천을 받고, (가난한 예술가인) 밍군을 졸라 받은 책..^^
수록된 작가들의 명성이나, 글, 사진의 분량을 보아서는 \38,000이라는 가격이
아깝지 않은듯 하다가도, 사진 한장씩만 딸랑 소개된 작가들을 보자면,
그 작가와 작업들에 대해서 이해하기는 다소 역부족인 것도 사실.
(물론 비중있는 작가들 - 크루드슨, 신디셔먼 등등등은 작가의 말을 비롯한
글들을 수록하고 있어 작업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나, 최근 작업 위주로 소개를 하고 있는 터라,
관심이 있던 작가라면, "아 요새 이런 작업들을 하고 있군"이라고 끄덕이겠지만,
생소한 작가의 경우엔 접근하기에 어려움이 많다.
문제는 80명중 이름이나 들어본 사람이 10명이나 될까말까하다는 것--;
(대표적인 예로 지난 광주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토마스 데만드의 경우 사진 한장과 짤막한 해설 한줄로는
그의 작업이 어떠한 작업이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절대절대 알 수가 없다.)

인물/풍경/내러티브/오브제/패션/다큐먼트/도시

와 같이 장르를 나누어 작가와 사진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서문 및 각 장르에 대한 소개 글들은 상당히 읽을만하다.

전체적으로는 사진 애호가들을 위한 카탈로그 성격의 책으로,
미술 시장의 경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어찌보면 미술시장 입문을 위한 갈라잡이 같은..?^^)
나같은 사람에게는 소개된 작가들의 이름과 작업들을 맛보는 정도에 의의를 둬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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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개인적으로는 여기저기서 글로서 접한 앨런 세큘러가
사진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만으로도 상당한 수확이긴 했다^^
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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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회화 vs 사진의 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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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정의가 애매하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같은 거장의 작품도 예술이고, '예술'이라는 단어가 있기 전에 그려졌던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도 예술이라 불러지고, 바로 이 순간, 강원도 노인이 그리는 모래로 그린 그림도 예술이라 일컬어지고, 청계천에 놓여진 생뚱맞은 플라스틱 소라모양 조형물도 예술이라고 불러진다. (개인적으로는 '예술가-직업적인 훈련을 받거나, 그 그룹에 인정받은 사람'에 의해 행해진 것이라고 정의내리고 있긴 하지만) 연일 소개되는 작품들이나,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예술 작품들을 보자면 '누구나 예술가', '그 무엇도 예술작품'이 되는 시대가 도래한 듯 하다.

 한편, '사진'이라는 매체도 예술의 견지에서 보자면 참으로 정체가 애매한 녀석인데, 사진 그 자체로 보자면 영상을 필름이나 디지털 등의 매체로 기록하는 장치이지만, 전문적인 훈련이 없이도(물론 전문적인 훈련이 무용하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셔터를 누르면 사진을 만들어 낼 수 있고, 대체 어디다 써먹을지 모르는(벽을,건물을 장식 하는 용도 이외에는?) 예술 작품과는 달리 보도, 일상의 기록-스냅, 상업 등과 같이 굳이 '예술'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며 (물론 이 중에서도 도대체 써먹을 데가 없는 사진들을 추려 -예술 사진-이라 분류하기도 한다), 예술의 장르에 사진을 편입함에 있어 기존 회화나, 조각등의 순수미술계에서의 미묘한 긴장감(물론 이러한 까닭에는 취미 사진 가들이 '예술한답시고' 나대는 연유도 큰듯 하다. 직업적인 예술가들이 보기엔 얼마나 같잖겠는가)을 보자면 대체 사진과 예술의 경계에 대한 의문이 떠오른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과, 과정을 살펴보는 책이 이토우 도시하루의 <사진과 회화>, 마리안네 케스팅의 <사진의 독재>이다.
 
 두 책 모두 사진의 출현에서 오늘날까지 시간을 따라 사진과 예술의 관계를 탐색하는 구성면에서는 비슷하나, <사진과 회화>는 제목처럼 회화와 원근법에 좀 더 비중을 두고 논지를 끌어나가는 반면, <사진의 독재>에서는 사진과 대립하는 대상으로 회화뿐 아니라, 문예작품을 포함시키고, 사실/자연주의, 현실의 모방의 관점에서 논의를 끌어나가고 있다.

 <사진과 회화>는 르네상스에 이르러 완성된 선원근법을 이상적인 자연의 모습을 목표로, 자연의 불완전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개념으로 파악하고, 이후 '사진적 시각'으로 불리는 부분적인 시각의 원근법으로 변모해 왔음을 제시한다. 즉, 사진의 발생 이전에 이미 예술에 '사진적 시각'이 존재해 왔으며, 따라서 사진은 '예술의 사생아'가 아니라, '예술의 적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회화가 이루고자 했던 목표를 단숨에 이뤄버린 사진을 회화(예술)는 어떻게든 배척할 수 밖에 없었으며, 보들레르의 표현을 빌어 인간 상상력의 고귀한 결과물인 회화는 보이는 것을 그대로 따라그리는 천박한 것(즉, 사진)이 아니라, 예술가의 상상력을 거쳐 자신만의 시각으로 이상화되어야 함을 목표로 함을 천명하였다. 따라서 '나는 천사를 보지 않았으므로 천사를 그릴 수 없다'라고 천명하며 극단적으로 시각적인 재현에 충실했던 쿠르베가 당시 살롱의 관계자들과 화가들에게 멸시를 받았던 것과 같은 이유로 사진은 예술의 적이 되었다.(아이러니 하게도, 화가들은 사진을 수집하고, 사진을 자료로 삼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때문에, 사진이 자신의 특성을 포기하고, 얼마든지 회화적인 표현이 가능함을 증명하려 했던 반동의 시기도 있었으나,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사진의 매체적 특성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일군의 작가들이 나타난다. (책에서는 데이비드 호크니 등이 언급된다.) 해서 책은 회화와 사진은 대립의 관계가 아닌 형제로서 파악되어야 함을 밝히며, 정(회화)-반(사진)-합(예술의 상승) 식의 다소 나이브한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 (20세기 초 사진과 회화의 관계를 밝히는데 뒤샹의 유작을 끌어들이고 있는데, 몇 번 읽어보아도 도저히 그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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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사진의 독재>는 그 제목과 <예술의 모방에서 그 압도에 이르기까지>라는 과격한 제목이 제시하듯, [예술의 종말]에 대해서 언급한다.

 19말-20초에 있어서 사진과 예술의 대립에서 나타나는 양상과 그 분석은 <사진과 회화>에서 나타난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예술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나가게 되고, '회화의 본질'과 같은 예술 자체를 주제로 삼는 예술들이 유행하게 된다. 보들레르, 카프카, 피란델로 등은 사진의 기술적 특징을 문제 삼아 사진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들을 제시하는데, 도구 의존적이며, 확대 재생산이 가능한, 강렬한 시각적 충격인 이 매체는 결과적으로 어떠한 것도 제시하지 않으며, 인간의 자율적 의지에 반하는 것이었다. 한편 사진은 사진대로, 기술적인 완성과 함께, 이러한 편견을 극복하고자 여러 시도를 하게 되는데, 앞서 언급했던 회화를 모방하는 사진등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라즐로 모흘리 나기나 로드첸코 등이 선보였던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는 새로운 시각, 극단적인 확대, 축소 사진,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하여 보여주는 등, 눈의 시각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며, 회화가 추구하고 있던 추상성을 따라잡는데에 이르렀다.

  회화는 회화대로, 사진을 극복하기 위하여 다양한 시도(추상과 같은)를 하게 되는데,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속담처럼, 사진을 피하기 위해 사진을 알아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20세기 중반 팝아트에 이르면, 아얘 사진적 시각을 그대로 도입하여 '소격-낯설게 하기'시킴으로서 사진을 극복(사실은 압도당함)하고자 하는데, 2차원적인 현실의 모사를 넘어 아얘 3차원적으로 (물론 완전 비 실용적인) 사물을 모방하는 작업(올덴버그 등의)들까지 등장하게 된다. 척 클로즈는 사진을 그대로 확대 모사했고,(그의 작품 앞에 서면 사진과 다른 것은 그 압도적인 크기뿐이다!) 퍼포먼스나, 행위, 대지 미술가(크리스토퍼, 조지&길버트 등등..)들은 등등은 자신의 작업들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이처럼 사진이라는 매체는 예술을 압도하기에 이르렀으며, 예술품의 복제와 보급-즉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의 상실-에 사진이 미친 영향을 고려한다면, 사진이 예술 전반에 미친 영향은 실로 예술을 종말로 이끌고 있다고도 할만하다.

 마리안네 케스팅은 말미에 이르러 현대의 예술의 위기(사진을 피해 달아나고자 했으나 실패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숨기지 않는데, 칸딘스키가 언급한 예술의 의미-'다양한 면모로 나타나는 다기능성'- 즉 무용하기 때문에 뭔가 있어보인다는 -를 인용하며 예술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만이 이 국면을 극복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2013년 1월 23일 추가

사진이 회화의 적자라는 주장은 91년 MOMA의 사진분과 큐레이터로 취임한 Peter Galassi 주장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1980년초 Peter Galassi가 조직한 <Before Photography: Painting and the Invention of Photography>전에서

Heinrich Schwarz의 영향을 받아 사진과 회화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Peter Galassi의 인터뷰를 참고.(naive youth한 시절의 이야기라고....ㅎㅎ)

http://lejournaldelaphotographie.com/entries/5566/peter-galassi-30-years-at-the-moma 
 

 

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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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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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짜한 스타와 예술가는 왜 서로를 탐하는가
(Art and celebrity  )
 
존A.워커| 홍옥숙 역| 현실문화연구| 2006.08.07 | 511p | ISBN : 8992214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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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교양서(?)를 고를때 가장 큰 기준이 되는 것이, 저자와 출판사가 아닐까 싶다. 존.A.워커는 <대중매체시대의 예술 (열화당)>로 친숙한 사람이고, 현실문화연구는 꾸준히 알찬 책들(혹은 재미없는 책들!)을 출간하는 출판사.(개인적으론 <니코폴> 등의 유럽권 예술만화들을 접하면서 알게 되었다.)

 저자와 출판사를 보면 망설임이 없어야 하는데....
제목이 좀 수상하다 <유명짜한 스타와 예술가....> 라니.. 혹시나 해서 영어제목을 살펴보니 <Art and Celebrity>, 번역하자면, <예술과 명사>쯤. 아마도 독자들에게 보다 편하게 다가갈 요량으로 과장스런 제목을 붙인 것 같다.

 책은 참으로 방대한 분량의 스타들과 예술가, 그리고 작업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스타들의 예술 수집 취향에서, 예술 활동에 직접 참여하는(프리미티브적인) 스타들, 스타들을 소재로 삼는 예술가들, 예술계의 스타들, 무영영웅(일종의 리얼리즘적인)과 예술등을 195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망라하고 있다.
 
 모든 책이 그렇 듯, [아는 만큼 보이게 마련]인데, 주로 영미권 스타들과 예술, 예술가들의 관계를 조명하는 까닭에, 영미권 문화를 피상적으로 접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런 일이 있었구나'수준의 이해로 넘어가야 할 부분이 많았다. 이를테면 빈센트 프라이스나, 데니스 호퍼, 폴메카트니가 예술을 수집하고, 그림을 그렸다는 것 보다는, 유인촌이 문화부 장관이 되었고, 정종철이 사진전을 열었더라 하는게 좀 더 피부로 와닿는 것과 같은 맥락이랄까.

  유명 스타들과 예술의 관계를 조명하는 챕터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예술과 미술 시장, 그리고 예술가들의 관계, 예술가들이 스타를 소재삼아 활용하는 까닭등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지는데, 영미권 예술계의 지형도를 관통하는 존.A 워커의 방대한 수집 능력과 통찰력이 돋보인다.(허나 역시 그쪽 분야에 대한 내 배경이 부족한 까닭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사실 이 부분까지 진행하면서, 나의 영미권 문화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감안하고라도, 어딘지 모르게 글이 불편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무명영웅'에 대한 단락에 접어들면서, 내 느낌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전작인 <대중매체시대의 예술>을 보면, 상당히 객관적인 시각으로 대중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 조명해 오다가, 다소 급진적인 시각으로 리얼리즘-참여적인 예술의 미래에 대해 피력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무명영웅'에 대한 단락은 <대중매체 시대의 예술>의 결론부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덕분에 이 단락에 이르러서야 진행이 무척 힘차고, 비로소 저자가 하고 싶던 말을 던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냥 예술의 사회참여에 대해서 쬐끔 생각해보고 있는 개인적인 생각 탓일 수도 있겠다.
 
책은 주로 영미권을 배경으로 예술과 스타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예술계의 스타들과 미술 시장, 그리고 참여적성격의 예술황동까지 방대하게 소개하고 있다. 문화적 차이 때문에 다소 거리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좋든 싫든, 현재 문화를 선도하는 곳은 영미권이고, 우리는 시차를 두고 그들을 쫓아가는 것이 사실이기에, 앞으로 우리 문화계의 예술과 스타의 관계가 나아갈 바에 대한 예언서, 내지는 참고서로서 존.A.워커의 탁월한 통찰과 더불어 그 의미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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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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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 임시 공휴일이지만, 출근을 해야 하는지라
아침 일찍 6시가 되자마자 투표소를 찾았다. 그 시간 즈음 가면 내가 1등일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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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건만, 벌써 30여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투표용지를 받아들고 기표소에 들어가서 나오는 순간까지
내내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책이 있었으니...

이제 소개할 주제 사라마구의 "눈 뜬 자들의 도시" 이다.

전작인 "눈 먼 자들의 도시" 부터 소개하는 것이 순서는 맞겠지만,
시국이 대선 시즌인지라, 권력에 대한 통렬한 우화인 이 책부터 소개를....

"선거날, 모두가 백지표를 던진다면?"

 사전에 서로간의 아무런 합의 없이, 어떠한 선동이나 음해도 없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백지표를 던진다면.. 과연 정치인들은, 권력은
어떻게 해야만 할까...

너무나도 유쾌하고 상쾌하고 통쾌한 설정이다.
무효표도 기권표도 아니고, 새하얀 백지표가 가득한 투표결과를 받아든
정치인의 백지표처럼 새하얀 얼굴을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지 않는가!

위정자들은, 정부는, 이 사태를 반국가적인 상황으로 규정하고, 도시를 버리고, 고립시키지만
도시가 혼란에 휩싸일 것이라는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마치 그들이 떠나길 기다렸다는듯,
평소와 다름없이, 그리고 어떠한 합의도 없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시민들, 그리고 도시.
약올라하는 위정자들, 그리고 음모를 꾸미는 위정자들.


어릴적부터 귀가 따갑게 들어왔던, '국민', '주권', '의무', '권리'........
오늘도 여기저기서 '투표는 신성한 권리', '투표하지 않은 자는 나중에 왈가왈부하지 말라',
'의무를 다하고 주장하자', 등등 투표를 독려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한데, 언제부터서인가 과연 '국민', '주권' 등등의 것들이 우리가 배웠던 것처럼 '당연'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음모론처럼 들릴 수도 있는 이야기겠지만, 결국 권력을 쥔 사람들이
말장난이 아닌가 하는 생각들. 통제사회니, 훈육사회니 하는 것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 걸까.
이 해답을 찾기 위해 재미도 지지리도 없는, 하지만 이 분야에 정통하다던 네그리의 '제국'을
읽었지만, 이해하기도 힘들었고, 책을 읽고 내린 결론은 새롭게 쓴(아니 제대로 쓴?) 역사서일 뿐,
내게 어찌 행동하라고는 이야기 하지 못한다는 것.(그런면에서 영풍문고 세계사 책장에
'제국'이 꽂혀있는건 정말 정확한 분류였다.)

한데, 내노라하는 석학이 썼다는 인문서도 제시하지 못했던 '행동 강령'을,
어찌보면 '소설 나부랭이(라고 하기엔 그 무게는 너무 크지만)'가 내게 제시해주었다.
'자발적인' 시민 행동 - '국가(정부)'가 필요 없다라고 보여주는 것 - 그 어떤 선동도 없이.

물론 매우 이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적어도 하나의 해답을
제시해주었다는 것이, 너무도 너무도 감사한 책. 땡큐 사라마구!

그래서 백지표를 던졌습니다.

그래서 백지표를 던졌습니다.



ps. 기호 0번이 있었으면 좋겠다. 기호0번 - 뽑을 사람 없음. 모두 물러나라.
Posted by 냐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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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등등..
숱한 베스트셀러로 화제를 뿌리고 있는 파울로 코엘료의 신간.

아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남들이 좋다면 일단 부정하고 보는 삐딱한 심성의
소유자인 냐궁이기에.. 선뜻 코엘료의 책을 고르지는 못했지만,
3만원 이상 구입 만원 적립이라는 적립금의 유혹에 넘어가 '밑지면 말지..' 하는 심정으로
'포르토벨로의 마녀'를 골랐다.

"과연 얼마나 굉장하길래 사람들이 열광하는걸까?"
라는 부정적인 의심을 두고 읽기 시작한 책은 크게 두가지로 결론이 나는데...

case 1: '역시 그냥 그렇군...'

case 2: '읽다보니 굉장한걸!? 와우!!'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게는 전자의 경우였다.

서평이나, 책 소개에는 신의 여성성이라던가, 여성이여 깨어나라 라든가...
상당히 급진(?)적인 단어들이 가득이었는데....
이쪽동네와 그네동네의 문화의 차이일런지..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바를 잡아내기가 워낙에 애매한데다,
그 결론이 그렇게 급진적이거나,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녹취록 형식으로 시작하는 도입부가 객관성 + 긴장감을 조성해서
초반 몰입에 도움을 주긴 했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결국 작가 할소리는 다 하고 있는거로군...'이라는 생각과 함께..)
맥을 천천히 놓는 바람에 그냥 뒤의 사건과 결말이 궁금할 뿐,
과정의 의미나, 개연성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책의 주제나, 저자가 말하고 싶은 바에 대한 판단은
독자 개개인의 판단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여기저기 씌여있듯, '여성' 혹은 '여성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아테나..라는
'먼치킨'류 캐릭터가 감당하기에는 왠지 나이브한게 아닌가 싶다.

Posted by 냐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