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아침신문에 눈길을 끄는 사진이 있었다.

 비접촉식 체온계를 들고 시민의 체온을 측정하는 인도 경찰의 모습.

(인터넷판 신문을 찾아보았으나, 다른 사진이 실려 있어, 해당 사진의 출처는 결국 찾을 수 없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자연스레 너무도 유명한 1968년 에디 에이담스(Eddie Adams)의 <사이공의 처형> 사진이 떠올랐다. 구도나 포즈나, 너무나 유명한 사진이니, 다분히 오늘날의 신문기자가 의도하지 않았을까 싶은 구성이지 싶었다.

 

하지만, 내게 더 흥미로웠던 점은, 두 사진이 권총을(체온계를)겨누고 있는 경찰/군인과

이를 맞는 시민(혹은 베트공)의 구도적인 시각적 유사성과 달리, 내용면에서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었다.

68년의 희생자(?)는 얼굴을 찡그리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반면,

오늘날 인도의 시민은 너무도 당당하게 체온계를, 경찰을 응시하고 있다.

1968년과 2020년이라는 세월을 사이에 두고, 닮은 듯 다른 두 사진을 발견한다는 것은

나를 꽤나 흥분시켰다.

 

이러한 발견은 그리 드문 편은 아닌 것인지, 이라크전 당시 종군기자였던 Sophie Ristelhueiber는 헬기를 타고 이라크 상공을 찍은 전쟁현장의 사진에서, 만레이가 뒤샹의 작품에 내려 앉은 먼지를 찍었던 <Dust Bleeding>을 연상하고 사진이라는 매체가 세상을 보여주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왼편 : <Dust Bleeding>, 만레이, 1920 / 오른편 : <Because of Dust Bleeding>, Sophie Ristelhuiber, 1991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러한 발견을 기쁘게 지인들에게 공유하고자,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리려던 순간,

 잠시 주저할 수 밖에 없었는데, 혹시나, 인도의 지인들이 이 사진을 보고 인도의 공권력에 대한 - 베트남전에서의 즉결처분처럼 - 비판적인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부연설명을 곁들이고, 바이러스와의 싸움 / 이념의 싸움이라는 기본적인 전제가 다르니,

 굳이 그런 불필요한 오해는 하지 않을듯 하여 약간의 부연과 함께 사진을 올렸는데,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우선 한국의 지인이 "저 베트남전 사진의 희생자가 실상 무고한 사람이 아닌 비무장 시민을 학살한 게릴라를 사살하는 사진인데, 사진의 프로파간다가 껄끄러운 측면이 있는건 알고 있느냐" 고 댓글을 달았고, 인도 친구 한명은 "저 사진가가 이 소리를 들으면 까무라치겠는데요?" 라는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사실 다른 인도 친구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는데, 한달에 한번정도 올리는 포스팅에 열렬한 좋아요를 눌러주던 그들을 생각해보면, 분명 이번 포스팅은 거슬리는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위의 지인과도 이야기를 해보고, 다른 인도 친구들과도 이  두 사진의 비교가 그렇게 껄끄러운 구석이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① 대부분은 베트남전의 사진에 대해 모르고 있었고,

 ② 베트남전 사진은 사람이 죽는 사진이고, 인도의 사진은 사람을 돕는 사진인데,

    둘을 비교를 한다는 것은 공감이 가지 않는다.

 

 사실 ②번이 정확히 내가 흥미롭다고 생각한 지점-유사한 형식, 다른 컨텍스트-인데,

 부연설명을 했음에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그 분리가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이유를 추정해보자면, 아마도 부연설명-글을 읽기에 앞서,

 두 이미지의 비교를 통해 아래와 같은 즉각적인 시각적 판독이 일어나는 것 같다.

 

    신문 기사의 사진 : 사람을 돕는 사진   /   베트남전 사진 : 사람을 죽이는 사진

 

 사실 내가 의도한 바는 아래와 같다.

 

   신문기사의 사진 : 총을 겨눈 동작 / 사람을 돕는 사진  / 베트남전 사진 : 총을 겨눈 동작 / 사람을 죽이는 사진.

 

 더불어, 두 사진을 비교하는 내 의도는 역사적 맥락을 걷어내고,

 순전히 그것들의 형식과 내용의 닮음과 다름에서 오는 발견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것이었는데,

 

 두 이미지의 비교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분히 두 사진의 외부의 맥락들,

예를들면 : 베트남전 당시 사진이 전달했던 프로파간다, 인도의 경찰에 대한 대외적인 이미지,

 을 고려하여 두 사진을 비교하고, 의도를 품고 사진을 비교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베트남전의 사진 이미지가 워낙에 강렬하기도 하고,

 또 인도인들은 이 상황의 당사자이다보니 다분히 복잡한 외부의 맥락들 속에서

 사진의 비교를 받아들이게 되고, 일단 한번 이렇게 두개의 사진 비교가 의미화 되면,

 그 이후에 어떤 설명도 처음의 시각적 문법을 뒤집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혹은 읽을 노력 자체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새삼 시각적 문법의 즉각성과 의미 고착의 강력함을 깨달았다.

 

 여기서 딜레마는, 비록 내가 그러한 의도로 올린 것이 아니더라도,

 다수가 나의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을 때, 

 철회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인데, 

 굳이 직접적으로 항의하는 목소리도 없었고,

 또한 당사자들이 아니라 외국인이니까 할 수 있는 비교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양성(?)을 추가하는 차원에서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그리고 결국 소심한 복수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앞서 개인적으로 사진이 불편한지에 대해 물어본 친구들에게는

 충분히 내 의도를 설명을 했고, 대부분은 내 의도를 이해하고,

 굳이 글을 내리거나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고 조언해 주었다.

 

 근데 그렇게 이야기 했던 그중 한명이 결국 뒷통수를 치는데...

 약 6년여간 알고지낸, 나름 친하다면 친한 친구녀석이 있는데,

 약간 힌두 민족주의 / 반중주의 / 친일(?!) 노선을 취하는 친구라,

 종종 힌두우파 테러리즘의 입장에 준하는 글을 보내주기도 하고,

 나는 나대로 질문도 하고, 다소 보편적인 차원의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며,

 나름 그런면에서는 터울없이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친구가 구자라트 지역에서 이슬람 폭동의 역사가 담긴 글을 보내주며

 

 "너는 이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테지만..."

 

 이라고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그게 무슨뜻이니?"

 

 "서구의 자유주의자들은, 모든게 그들(이슬람)에게서 시작되었음은 잊어버리고,

  이슬람을 피해자로 포장하지."

 

 "지금 나보고 그 자유주의자라는 이야기?"

 

 "난 너의 정치성향은 몰라, 하지만 흰것은 희고, 검은 것은 검다고 말해야겠어"

 

 

  나한테 너무 공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냐는 물음에 결국 미안하다고 이야기하긴 했으나,

  

  이것은 분명 상기한 사진 비교에 대한 소심한 복수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였고, 인도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서도 많이 알려준 친구이긴 한데,

  다른 인도 친구들과 교차검증을 해보면 편향이 심하기도 하거니와

  이런식으로 투정을 부릴거라면 관련한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거리를 좀 둘 필요가 있지 싶다.

 

 이상 나름 개인적으로 뿌듯한 발견에서, 시각 문법의 즉각적 독해에 놀라고, 그로 인해 소심한 복수까지 당한 이야기.

 

  

  

 

 

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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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preview.com/news/2012/01/25/Imitated_Image_Copyright_Case

 

 

 Amateur Photographer Magazine은 비슷하지만, 그대로 베끼지는 않은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 위반에 대한 이야기를 게재했다.
저작권에 대한 문제는 민감한데다가 논쟁도, 오해도 많지만, 이 건을 보면 영국 법정의 현재 입장을 짐작할 수 있을듯 하다.
두 이미지는 상당히 다름에도 불구하고(두 이미지에 뚜렷한 연관점은 없다.), 법원은 결과적으로 뒤의 이미지가 앞 이미지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이는 이미지의 구성, 조명, 처리과정까지 원본의 저작권이 보호받을 수 있는 요소라는 것이다.)

Amateur Photographer는 저작권 전문가인 Charles Swan의 말을 인용해서,
"기존의 이미지를 모방하거나, 유사한 사진을 만드는 누구라도 이 판결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한편, 지적 재산권법의 법정 변호사인 Jane Lambert는 블로그(http://nipclaw.blogspot.com/2012/01/copyright-in-photographs-temple-island.html) 에 기고한 글에서 "비록 판결에 따르긴 하겠지만, 사진 <Temple island>에 대한 Birss 판사의 결정이 마음에 들진 않는다. 저작권의 보호가 표현 자체를 저해할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라는 입장을 밝혔다.

판결 전문: http://www.bailii.org/ew/cases/EWPCC/2012/1.html

판사는 원고(Justin Fielder)의 이미지가 원본이고, 사진을 구성하는 요소들과 대조적인 색상 사용의 측면에서 지적인 창작물이라고 결론지었다.
특히 Birss QC 판사는 두가지 시각적 대조를 강조했는데, "흑백 배경에 선명한 붉은 색의 버스와 사진의 나머지를 차지하는 흰색의 빈 하늘"이다.

 그는 또한 Houghton이 Fiedler의 이미지(둘은 이미 Houghton의 Fielder에 대한 저작권법 위반으로 이전에 법정에서 마주한 적이 있다.)를 이미 알고 있었던 점을 고려했고, 유사함이 관련되어 있다고 결론내렸다.

 결론에서 Birss 판사는 "재생산된 요소들의 정량적인 판단"이 어려운 부분이었음을 이야기했다. Fielder의 이미지는 단순한 사진과 구별되는 "사진 작업"이며, 이런 측면에서 후자의 이미지는 그 외형이 의도적으로 선택되었고, 작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작업된 것으로 보인다고 이야기 하며, 이런 관점에서 복제라고 결론지었다.그는 또한 Houghton이 만든 연작 (흑백 배경에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의 빨간 버스) 또한 "표면적으로 Fielder의 작업과 다른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뿐, 실질적으로 같은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라고 못박았다.

 

=================================================================================================

결론1. 판사는 바보가 아니다.

결론2. 독하게 맘먹고 덤비면 저작권은 코에 걸면 코걸이가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될 수도 있다.

 

암튼..이래서 베낄라면 대놓고 베껴야 한다.

쉐리 리바인, 쉘라빈, 셔리 라빈...(대체, 정확한 발음이 머야?, Sherrie Levine)은 대놓고 베끼고 그대로 찍어서

개념 미술이나, 포스트 모던, 예술의 죽음, 저작권 문제를 이야기 할 때,  미술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는 사람이 되었다.

워커 에반스의 사진을 고대로 찍어 전시도 하고..

 

아얘 뒤샹의 <샘>(요새 라디오 방송에서 발상의 전환하자고 자주 나오던데..)

을 금박을 해서 삐까번쩍하게 전시도 하고..

근데 이 분 얼굴이 궁금한데..

찾기 힘드네...-_-;

 

 

 

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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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사진 Free Gallery에 전시 소식이 실렸다.

인석형, 석구형의 이야기를 듣고, 급하게 지원했는데 이렇게 실려버려서 기분이 얼떨떨하다.

흔쾌히(?) 실어주신 월간사진 관계자분들께 감사할 따름.

한데, 여기서 더 진행된 사진이 아직까지 없다는 게 문제다. 작업하고 있는 사진이 한 장 더 있는데,

원하는 만큼 나와줄런지 잘 모르겠다.






2011년 2월 26일 - 3월 7일, 갤러리 유키(http://www.gallery-yuki.co.kr/)

초대일시 : 2011년 2월 26일(토) 오후 6시

허정우 개인전 <Apron-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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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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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Baldessari <Igres and Other Parables> 시리즈 中 <Art History>

 

 

 젊은 예술가가 예술학교를 막 졸업했다. 그는 교수에게 다음에 할 일을 물어보았다. "뉴욕으로 가게" 교수가 대답했다. "모든 갤러리에 작품 슬라이드를 들고 다니면서 전시해 줄것인지 물어보게." 예술가는 그렇게 했다.

 

 그는 슬라이드를 들고 갤러리들을 돌아다녔다. 각 디렉터들은 한장씩 슬라이드를 집어 들었다. 좀 더 잘 보기 위해 빛쪽으로 들어올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너무 촌스럽네요." 그들 모두 이야기 했다. "당신은 주류에 들지 못해요.", "우리는 예술사적인 것을 기대하고 있답니다."

 

 그는 노력했다. 뉴욕으로 옮기고, 끊임없이 그리고, 거의 잠도 자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박물관, 미술관 오프닝, 스튜디오 파티, 예술가들의 주점 등에 참가했다. 예술에 관련된 모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예술에 대해 꾸준히 읽고, 여행을 했다. 그는 쓰러졌다.

 

 그는  두번째로 슬라이드를 들고 갤러리들을 찾았다. "아" 이번에 갤러리 디렉터는 이야기했다. "당신은 마침내 미술사적(Historical)으로 되었군요."

 

 교훈: Historical은 Hysterical로 잘못 발음된다.

 

 주1) 존 발데사리의 1967-71년 작업 <Ingres and Other Parables(앵그르와 다른 우화들)>은, 텍스트와 사진 이미지가 결합된 작업으로서 이미지와 텍스트의 결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한편, 미술세계에 얽힌 우화같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있다.

 

 주2) 최근, 사진을 미술사적(Historical)으로 탐구해보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고 있다. 한데 내가 받아들이기에 내러티브보다 형식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경향이 뚜렷해 보여서, 여러가지로 생각이 복잡해지고 있다. 시도 한다면, 분명 눈에 띌만한 성장이 기대가 되긴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사진에 깊게 발을 들이거나, 혹은 내가 추구했던 것으로(그 추구했던 것이 무언가 이룩된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게 우스울 수도 있지만) 돌아올 타이밍을 잃어버릴까 걱정도 된다. 뭐 될대로 되라지.

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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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토요일 아트 선재에서, 계원조형예술대학교의 주최로
 사진, 미디어, 자본주의라는 키워드를 놓고, 프랑스 제8대학에서 오신 석학들과의 학술대회가 있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종일 진행되었지만, 나는 결혼식이 오전에 있는 바람에,
2시경부터 들어가 주형일 교수의 <디지털 시대의 사진: 대중 예술의 가능성과 한계>라는
발제글부터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이렇다 저렇다 평할 짬은 안되지만, 간략히 소개/느낌을 적어보자면,

 주형일, <디지털 시대의 사진: 대중 예술의 가능성과 한계>
 - 대중에 속한 사람으로서, 사실 가장 관심이 가는 주제였는데, 다소 논의를 극단적으로 몰아가는 듯 했다.
 인터넷의 블로그를 사용하는 행위는 자본이 좋아하는 아주 착한 자발적인 무보수 노동자에 비해진다는 것,
 공동체(즉, 세력)를 형성해서 인터넷을 소유한 자본들에 대항할 수 있다는 의견 제시나,
 이미지의 무한 복제를 통한 저작권의 무력화, DDOS를 연상시키는 사이트 공격 등의 극단적인 대안은
 어쩔 수 없이 자본과 공생해야 하는 절대다수의 대중들에게 요구하기는 (발제자도 인정했다시피)
 무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의 시간의 이영준 교수 말마따나, 자본을 어떻게 공격할 것인가보다는
 자본에 이용당하는 것을 어떻게 피할 것이냐가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까.

 쥘리앙 세레쥬, <자본주의의 사진적 재현에 관하여: 도시와 일상>
 - 자본주의를 어떻게 사진으로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 논의를 발전시켜 나갔는데,
 결과적으로 '일상성'으로 초점이 모여지는 듯 했다. 하나로 정의할 수 없고, 계속 변화해 나가며,
 복잡한 양상들이 얽혀있는 것이기 때문에, 도시의 외부에서, 내부에서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을 수 있고,
 또 그곳에서 일어나는 굉장히 지엽적이라고 보이는 일상적인 것들이 바로 도시의 모든 것 일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혹은 반대로 말하면 도처에 존재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말미에 Eric Sadin의 문화분석적인 사진을 모범예(?)로 제시했다.
 한데, 저기서 도시나, 자본주의를 빼고 '삶'을 넣어도 말이 그대로 될 것 같다. 결국 우리의 삶이
 자본주의의 삶, 도시의 삶이기 때문일까?
 (참고로 본문과 상관은 없지만 쥘리앙 세레쥬의 아내는 한국 사람이라고 한다.)

  서동진, <생명의 이미지, 자본의 이미지>
 -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CT, MRI의 의학영상에서 부터, 첨단의 의학영상분야까지 소개를 하면서,
 인체를 투명하게 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 그리고 그것들이 점차 병의 진단을 넘어서서 병의 확률을 이야기 하며
 의료행위와 그 영상들을 자본종속적으로 변화시켜 간다는 이야기. 달변과 신선한 주제로 흥미로웠다.

 박상우, <사진 복제를 통한 개인의 식별>
 - 용의자 검거에 사진이 도입되기까지의 역사적인 설명과, 그 사진들의 복제되기까지의 과정들.
후반부는 주로 프랑스 경시청의 베르티용(최초로 사진을 용의자 수사에 도입했음)의 노력에 촛점이 맞춰졌다.
 발표하느라 진땀은 빼셨는데, 다소 발표 스킬이 부족하셨던듯..^^;





 

ps.1 발제글들이 수록된 자료집을 사고 싶었지만, 품절인 관계로, 연락처만 적어놓고 왔다.
내가 듣지 못한 앞서 발제글중, 프랑스와 슐라쥬의 <사진, 미디어, 자본주의적 관계의 관계들>은
번역도, 통역도 난해했다는 이야기들이 들리는 것 같다.

ps.2 장내에 들어서면서 놀랐던 것은, 대략 2/3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청중. 연령대도 다양한듯 했다.
이렇게 많은 여성 예술(or 미학)인구에 비해..두각을 드러내는 이는 상대적으로 남성이 많으니..음...
뒤에 앉아 있던 두 여자분은 통역기를 귀에 붙였다 땠다 하며, "통역이 너무한데? 이렇게 빼먹어도 되나?"
를 연발하고 있었는데..그저 부러울 뿐.
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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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부터 KT&G에서 운영하는 일종의 '문화지원센터'인 상상마당에서 사진 강좌를 듣고 있다.

 SLAP(SangSangMadang Life-Art Photographer) 프로그램으로, 생활사진가 프로그램 정도로 보면 되겠다.

원래 수업의 목적은 기존에 찍은 사진들 중에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전시/ 출판까지 하는 것이지만, 이왕 하는 김에 이번에 새로운 포트폴리오(?)를 하나 만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진행을 했다.(그래서 상상마당 내부적으로는 교육프로그램이 아니라 '지원'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석달에 5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수강료이지만, 출판과 전시에 대한 부분은 100% 상상마당 측에서 지원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담배를 주제로 하는 다소 짖궂은 장난을 시도했다. 즉 상상마당의 모체인 KT&G를 건드려 보는 것이었다.

 작업 의도를 설명하자면,
 
 담배가 유해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담배를 만드는 사람과 담배를 피우는 사람, 누가 더 나쁜 사람일까? 현실에서의 답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다. 담배로 인해 막대한 사회적인 손실이 발생하지만, 그 손실의 비용은 담배를 피우고 건강을 해친 '개인'에게 고스란히 떠넘겨진다. 혐연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담배회사를 나쁘다고 지적하기 보다는 '담배 피우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이야기 한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 담배 회사들이 된서리를 맞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담배 회사들이 담배로 건강을 잃은 개인에게 보상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미국발 담배소송 소식이 들려오지만, 개인의 승소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고, 국내도 7년간 공방 중이지만, 진행이 지지부진하며, 유럽의 경우엔 담배 회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물론 담배 회사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여론으로 국내의 경우를 보면, KT&G 복지재단, 상상마당 등등으로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또 그 긍정적인 이미지는 고스란히 KT&G의 이미지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활동에도 금연 캠페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왠지 병주고 약주면서 생색까지 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최근에 한국금연연구소를 후원하여 청소년 금연 캠페인을 벌이긴 했으나, 거의 1人 NGO인데다가, 이왕 피울거면 양담배 말고 국산담배! 를 외치는 한국금연연구소의 활동을 보면, 고개를 갸웃할 수 밖에 없다.)

 물론, 현실적으로 '담배'라는 유해소비재가 '필요악'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수많은 흡연자들의 존재가 그것을 증면한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담배 자체가 '좋은 것', '괜찮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쁜 것은 나쁜 것일 뿐이다. 담배를 없애지는 극단적인 이야기까지 하고 싶진 않다. 다만, 내가 수업을 듣는 상상마당의 (고마운)존재는, 각도를 달리해 보면, 결국 수많은 개인들이 피워올린 담배, 그 희생에 기반한 것임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담배로 상상마당 건물을 만들어 태웠고, 그 장면들을 찍어 현재의 상상마당 건물의 모습과 합성을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실 이같은 작업에는 나름 존경해마지 않는 한스 하케(Hans Haacke)의 모티프가 있다.
 1971년 한스 하케는 뉴욕 구겐하임에 초대되었고, 그 때 내건 작업이 구겐하임 미술관의 후원자인 샤폴스키 그룹의 맨하탄 부동산 소유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결국 전시는 취소되었고, 담당 큐레이터는 해고되는 사태를 맞았다. (이 작업은 지난 광주 비엔날레에도 소개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를 한스하케에까지 비교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과연 그로부터 30년이 훌쩍 지난 오늘 상상마당은 KT&G에 적대적(?)인 작업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사실 이 게임은 애초에 무척 불평등한 게임이다. 내 작업이 허용된다면,  어쨌거나 KT&G로서는 불편할 수 밖에 없는 일이고, 만약 거부한다면, 결국 기업의 문화, 예술 후원이라는 것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위선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는 셈이니, 나로서는 어떤 결과가 나오든 목적은 달성하는 셈이다. (그런데, 사실, 기업 입장에서, 나따위가 그런 전시를 한다고 해서 과연 어떤 영향이 있을까? "그래, 뭐 저건 예술이니까. 누가 신경쓰겠어?" 라고 말하면 그만 아닌가싶다)

 지난 토요일 수업시간에 전시에 쓰일 사진 선정 시간이 있었고, 교수님과, 상상마당 관계자의 당황한 표정을 목격했다. 그리고 고민해보겠다는 말을 들었다.  나역시 극도로 보수적인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의 일원으로서, 관계자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도 있다.  앞서 말했듯, 어쨌거나 나는 목표를 달성할 수 밖에 없는 불평등한 게임이니까.

 그저 내 개인 작업의 성공(?)을 위해서 멀쩡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고민도 있었고, 지금도 그 고민은 여전하다. 나는 그저 '공익'이라는 허울에 내 자신의 영달을 위해 남들을 괴롭히는 '진상' 혹은 '찌질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거나 주사위는 던져졌고, 최소한 KT&G의 예술 후원의 '진의'를 떠보는 의의는 가지지 않을까 싶다.
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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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용산참사 이후, 언론과 인터넷 상에서는 과격시위와 강경진압을 놓고 한동안
갑론을박이 한창이었다. 철거민들을 옹호하는 논리는 주로 그들이 처한 현실적 절박함을 이야기 했고,
그에 맞서는 사람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다는 류의 원칙론을 펼쳤다.
양쪽 모두 그럴듯해 보이는 논란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무의미한 양비론을 제외하면) 나는 과연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

 심정적으로 '사회적 약자'라고 칭해지는 철거민들의 편에 쏠리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사태를 조금 냉정하게 살피자면, 갈등의 주된 주체인 (집주인들의)조합과 세입자를 비롯
시공사, 관련 행정 기관까지 각자의 '이득'을 위해 밀고 당기는 데다가, <재개발>이라는
거대한 경제 논리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까닭에 편을 정한다 하더라도,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굳이 절대惡을 뽑자면, 조합이나 세입자들과는
이해 관계가 없는척 하면서, 손안대고 코풀자는 식의 시공사를 뽑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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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잡한 현실에, 복잡한 마음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곰곰 생각해보았고,
해서 내린 결론이 재개발 현장에 가서

떠나간 이들의 행복을 빌어줄,
떠나올 이들의 행복을 빌어줄,
남아있는 이들의 갈등을 덮어줄,
(그리고 공사현장사람들이 난데없는 돌무더기에 살짝 당황했으면 싶은)
(그리고 내 자신의 조그만 표현이 되어줄)

 '돌탑'들을 쌓고 오는 것이었다.
(두달여전부터 머릿속으로 생각만 해오다 마침 주말 사진 포트폴리오 수업이 계기가 되어
 움직일 결정적인 동기를 부여받았다)

 지난 일요일 저녁엔 아현 4구역에 들렀다. 애오개역을 기준으로 동쪽에 위치한 구역으로,
만리동고개로 이어지는 달동네가 위치한 곳이다. 고등학교 시절 달동네 꼭대기의 <환일고>에 오르느라
아침부터 땀을 뻘뻘 흘렸던, 하교길이면 그야말로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길 사이사이로 비탈을 달려 내려오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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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시간 여 정도 재개발 구역을 둘러보며, 여기저기 돌탑을 쌓다보니, 비도 부슬부슬 내리고, 날도 어둑해져
돌아갈 채비를 하던 중, 문득 뒤쪽 집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복실아, 복실아, 이리와!"

 순간적으로 현장 관계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몇 번 제지를 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헐어진 벽 뒤로 몸을 숨기고, 인기척을 죽였다.

 "복실아, 이리와! 안돼!...어어.."

이리저리 헐어진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던 '복실이' 덕분에 어쩔 수 없이 모습이 노출되고 말았고,
 쌓던 돌을 밀어놓고,아무렇지도 않은 척 사진 찍을 구도를 잡는 척 했다.

 "사진 찍으러 오신거에요?"

 "아, 예..안녕하세요.."

 "나도 인터넷에다가 종종 사진 올리지만.. 거, 옛날 추억 이런거 말고, 여기서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떠나가는 사람들 그런거 좀 찍어봐요.. 난 여기 안살지만, 여기 다 수십년씩 사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인데,
 평당 800씩 주고, 자기네들은 평당 1600씩에 분양하면, 서울 어디가서 살라고..."

현장 관계자분은 아닌가보다. 일단 다행.

 "그쵸..정작 원래 살던 사람들은 못들어오는게 재개발이죠.."
 
 "재개발 몇년전부터 부동산들 들어와서 다 쪼개놓고, 조합은...이건 완전 브로커야,
 건설사하고 주민들 사이에서 조합이 다 해먹는다고...
 세입자들 이사비용 700, 800씩 집주인들이 다 해준거라고..."

 "요 앞에 3구역 조합임원들 100억원 해먹었다고 엊그제 났더라구요..."

 "내가 엊그제 세봤는데, 아직 헐리지 않은 집에서 30%정도는 남아있는 것 같아....
 에휴..재개발 이건 완전 잘못된거라고..누구 좋으라고 하는건지 원...
 복실아! 이리와! 이렇게 사람 좋아하는 강아지를 누가 문다고 하는건지....
 지가 해코지하려니까 무는거지..암튼 조합놈들.... 그럼 수고해요.."

 "예, 들어가세요.."

 마저 돌탑을 쌓고, 사진을 남기고, 길을 걸어 내려가던 중, 복실이네 집 할머니를 만났다.

 "조합에서 나왔어? 아직 안헐린 건물들 있으니께 헐어내라고?"

 당황한 마음에 대충 둘러댔다.

 "아뇨, 인터넷에 올리려구요."

 "어머니, 그냥 작품 사진 찍으러 오신 분이에요"

 아까 그 남자의 말. <그냥 작품 사진>. 부끄럽다.

 "내가 억울해서 못나가, 평당 800씩 받고 어떻게 나가, 서울 어디가 평당 800이여,
 요 앞 3구역은 엊그제 뉴스에 났던디, 우리도 함 나야제..."

 저 위에 돌탑들을 내가 쌓았노라고, 이야기 해야 하는데, 변명하고 싶은데,
 내 나름의 실천이라고 생각했건만, 정작 현실의 사람들과 만났을 때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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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들어가세요, 그럼 수고하세요"

 "예, 안녕히 계세요...."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현실'의 사람이 지닌 강력함은,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논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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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냐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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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경쟁 (20세기 사진비평사)
리차드볼턴 | 김우룡 역
도서출판 눈빛



 흔히 '소통' 또는 '참여'로 이야기 되는 예술과 사회의 관계맺음은 언제나 뜨거운 감자이다.
많은 예술관련 비평서들이 그 관계맺음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정작 현실에서 모더니즘(즉, 자기지시적인 예술을 위한 예술)의 맹위는 유효하다.


 단시간내에 예술사에서 굳건한 위치를 차지한 '사진'의 경우도 이러한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까닭. 많은 사진가들이 자신의 작업이 '예술'과 구분되기를 바라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 하다.

 <의미의 경쟁>은 기본적으로 위의 질문-사진과 사회의 '관계맺음'에 대한 비평들의 모음이다.
 20세기 사진 비평사라는 부제에 걸맞게 <의미의 경쟁>은 사진이 미술관을 통해서
모더니즘 미학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시작해서, 예술 장르의 사진에 국한하지 않고,
광고, 언론, 다큐멘터리, 근대 경찰 사진에 이르기까지 사진이 어떻게 이용되어 왔으며,
그 사진에 존재하는 사회적, 역사적인 담론들과 과연 사진이 표방하는 진실이 무엇인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상당수가 논문으로 발표된 까닭에 쉽게 읽히는 글들이 아니며, 특히 동성애나, 중남미 혁명에
관한 글들은 문화적인 차이 등으로 해서 다소 접근이 난해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글들이 짚어내는 사진의 역사적, 계급적, 문화적 맥락과 날카로운 비평들은 마지막 장을
넘길때까지의 끈기와 인내에 충분히 보답을 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비교적 매끄러운 번역도 그 공로를 기릴 필요가 있다!)

 - 목차 -

미적 행위의 사회적 결과는 과연 무엇인가
-미술관과 도서관의 서로 다른 사진 인식 / 더글라스 크림프
-사진을 판결하는 자리 -뉴욕 현다미술관 / 크리스토퍼 필립스
(*스티글리츠와 사코우스키의 대결이 볼만하다)
-팩투라로부터 팩토그래피로 -사진에 있어서의 러시아 형식주의 / 벤저민 H.D. 부크로
(*서구 사진사에 밀려 역사속에 묻혀진 러시아 사진을 재조명하는 글로
  '생산주의'-사회참여라는 측면에서 흥미롭다)
-시각예술의 무장 해제: 무기로부터 스타일로 변천해 간 급진적 형식주의 / 애비게일 솔로몬-고도우

사진은 성별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 무엇이 전설을 만들었나: 짧고 슬픈 다이안 아버스의 삶 / 캐슬린 로드
- 어머니로서의 자연, 그리고 말보로 맨: 풍경사진의 문화적 의미에 대한 한 탐구 / 데보라 브라이트
- 그래픽을 통해 본 욕망의 우선 순위: 중산층 여성지의 현대화, 1919-1939 / 샐리 스타인
- 동성애의 맥락: 소수집단의 자기 표현에 관한 문제들 / 잔 지타 그로버

사진은 어떻게 국가와 계급의 이익에 부합하는가
- 기업 연감과 사진 / 캐롤 스콰이어즈
- 드러난 이데올로기와 숨은 이데올로기: 혁명의 두 이미지 / 에스터 패라다
- 미국 동부에서: 리차드 아베든 주식회사
(*최근 상업 사진가들의 예술사진 및 다큐 사진계의 진출이 활발한 우리의 현실과 절대 무관하지 않을듯한 글!)

사진적 진실의 정치학은 무엇인가
- 사진의 담론 공간들 / 로잘린드 크라우스
(*앗제의 사진은 과연 어떠한 진실을 담고 있는가?)
- 다큐멘터리 사진론: 그 속에서, 그 주변에서, 그리고 그 후에 / 마사 로슬러
(*다큐-타인의 삶을 담는다는 것은 과연 어떠한 담론 속에서 움직이는가!)
- 몸과 아카이브 / 앨런 세큘러
(*초기 사진사에서 가장 큰 업적이면서도, 정작 사진사에서는 소외받는 경찰/기록 사진에 대한 논의!)


ps. 사진 관련 비평 서적을 읽을 때 마다 점점 사진 한 장 남기기가 힘들어지는 듯 하다.
    사진에 대해 탁월한 비평을 남긴 수잔 손탁도, 그래서 평생 사진을 찍지 않았던게 아닐까.


 


 

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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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개의 끓는 점
이소/이현민/이혜인/정혜진/허남준
20090114 - 20090201

이예린 - After the Rain
갤러리 나우
20090128-20090203

김선회 - Finding Sun in the City
갤러리 룩스
20090128-20090210


아래 대화는 냐궁과 밍군의 전시 감상을 대화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다섯개의 끓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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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 전시 제목 그대로, 전혀 공통점이 없는 작업들인 것 같아.

냐궁: 아무래도 공모전 입상작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니까 전체적인 주제는 루즈할 수 밖에 없겠지.
개인적으로는 '이소'의 <순환하는 이야기>라는 작업이 마음에 드네. 익명의 편지돌리기라.....
일방적인 글쓰기라는 편지의 특성 때문에, 하나의 질문에 대해 관객들의 각각 다른 반응들이 재미있어.
한데..100원을 넣고 뽑기를 한다는 것이 재미는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포스트잇 붙여놓고
관객들이 글을 쓰는 것과 차이가 없을 것 같지 않아?

밍: 그렇게 한다면 아무래도 참여율이 저조하겠지. '뽑기'라는 것은 관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봐야할 것 같아. 정혜진씨의 작업은 무얼 말하려는지 너무 어렵지 않아?

이소,<순환하는 이야기>

이소,<순환하는 이야기>

이혜인, <Shelter-Boat>

이혜인, <Shelter-Boat>

정혜진, <토끼풀꽃과 실패>

정혜진, <토끼풀꽃과 실패>

냐궁: 동감이야. 석고로 토끼풀꽃을 만드는 것 보다 팝콘으로 해보는게 더 재미있이 않았을까?

밍: 팝콘 재미있겠다. 강냉이도 괜찮을 것 같아 잘 썩지도 않을테고...

냐궁: 이혜인씨 작업의 주제는 '변화'인가?

밍: 기억, 망각 등등까지 포함한다고 봐야겠지. 금번 시립미술관에서 진행한 '젊은모색'展의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할 거야. 공사 현장의 그림들은 구체적인 형태가 드러나서 그림의 맥락을
어느정도 짚어낼 수 있는데, 검은색으로 지우면서 나열식으로 표현한 그림들은 다소 접근이 어려운
느낌이 있네. 차라리 검은색으로 지우지 말고, 기억들을 레이어처럼 중첩해서 표현했으면 좋았을 것 같아.

냐궁: 허남준씨의 작업과, 그 작업하는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은, 전시론에는 어느정도 동감할 수
있지만, '손가는대로'식 작품론에는 개인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워.

밍: 뚜렷한 의도 없이 덧칠해지는 물감들..., 아마 학교에서라면, 교수님들의 호된 질타를 듣지 않았을까?
게다가 그림에 뿌려진 반짝이들과 바니쉬들은 팔리기 위해 준비된 상품과 같은 느낌을 주어서
거북한 느낌이 들었어.

냐궁: 이소씨의 작업이나 허남준씨의 작업에처럼 요즘 예술의 화두는 관객과의 '소통'일 것인데,
예술가의 설명을 보면 그럴듯 하긴 하지만, 왠지 그들만의 논리 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내 경우에 이소씨의 '익명 편지돌리기' 작업에 참여해서, 편지의 일방적인 성격이나, 하나의 질문에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다른 관객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지만, 단지 그 뿐이었어. 그냥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거야. 내가 참여함으로 해서 무언가 새로운 것,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단 말이지.

밍: 허남준씨의 퍼포먼스-관객은 구경하게 되는- 역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그냥 관객들은 구경할 뿐이지. 그것이 어떤 관객들의 행동이나 생각의 변화, 혹은 새로운 것들을
깨닫게 하지는 못하거든. 작가가 던지면, 관객들이 그냥 반응하는 수동적인 소통인 것이지.
어떻게 보면, 관객들입장에서는 오히려 불편하거나 혼란스러울 수 있을 것 같아.
수동적인 감상에 익숙해져 있는데, 갑자기 작가가 잘 알 수도 없는 작업들을 들고나와서
'소통'을 외치면서 관객에게 다가온단 말이지. 거기에 대해 수동적인 반응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그냥 반응일 뿐이지 '소통'이라고 이야기 하긴 어렵겠지.

냐궁: 어쩌면 지금의 '전시'-'감상' 으로 구성된 지금의 미술관 제도의 구조적인 한계일 것도 같아.
'소통'하면 관객이 참여해서 작업을 만들거나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어렵잖아.
조금 과격하게 이야기 하면, 미술관 벽을 부수는 작업에 관객이 참여해서 망치질을 한번씩 한다던가...

밍: 미술관이 잘도 좋아하겠네^^.


이예린 - After the Rain

이예린 <in Praha>

이예린 <in Praha>

뒤집어보기

뒤집어보기



밍: 거꾸로 뒤집어 보니...정말 평범한 사진이구나..

냐궁: 반영을 제외하고 흑백처리한 것 빼면...평범한 사진이야..
현실과 가상의 문제를 논하자는 건가? 그러기에도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데...

비온 후...비의 흔적이 보이는 시간의 세상..(중략).. 내가 가진 눈으로는 명확히 보이는,
내가 밟고 있는 이 세상, 그리고 잔바람이라도 불면 흔들리는 가녀린 자연의 액자와 그 여린
바람에도 흔들리고 있는 세상...(작업 노트 중)

밍: 작가의 말이 솔직해서 좋네..그리고 물결에 의한 미세한 떨림들도 보이긴 하니까...
영화 포스터 같은 느낌도 들고 거꾸로 죽 늘어놓으니까 시각적으로는 괜찮은 것도 같아.
뉴욕 미술사 교수가 적은 데카르트의 허상 현실 천재악마 등등의 말은 닭살스럽네.
굳이 그보다는 뉴욕이라는 국제적인 도시, 그 이미지에 대한 향수 등으로
이야기를 풀어보는게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냐궁: 그러게.. 개인적으론 이렇게 큰 사이즈로 인화할 거면 픽셀이 깨지지 않게끔
원본의 해상도에도 신경써줬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 아무리 대형 사진이 유행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깨지는 디테일은 안타까워...


김선회 - Finding Sun in the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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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궁: 사진마다 숨어있는 작가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정말 별로인 사진이 될 뻔 했어.

밍: 전시 서문을 읽지 않았다면, 작가가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갈 뻔 했어.
작가의 모습이 너무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아. 작가의 모습만이라도 칼라로 표시했으면 어땠을까.
그러고보니 '박현두'의 <Goodbye Stranger>작업이 생각나네. 역시 이국을 배경으로 한 자신의
 모습을 담은 작업인데, 이 작업보다는 분명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걸로 기억해.

박현두, <Goodbye Stranger>

박현두, 시리즈 중.


냐궁: 작가는 관광객도, 현지인도 아닌 경계의 상태인 자기의 모습과, 그런 자기에게 비추어진
무미건조한 도시의 모습을 담기 위해서 흑백으로 랜드마크들을 촬영한 것 같지만, 사진들이
너무나 '잘 찍은' 사진들이라서 무미건조하다는 느낌이 덜한 것 같아. 차라리 관광객들이 일반적으로
찍는 구도 - 다소 못찍은 듯한 연출이 자신의 경계상태를 더 잘 드러낼 수 있었을 것도 같아.
그리고 본인은 '자화상'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분명 누군가 찍어준 사진인데, 그렇다면
자화상이라기 보다는 포트레이트, 그리고 그 찍어준 사람에 대한 '소통'의 측면에 있어서
자신이 경계상태에서 '외롭다'라는 느낌은 반감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밍: 같은 맥락에서 이런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관광객처럼 사진을 찍는 것 보다는,
어떤 자기 주위의 공동체를 배경으로 대조적인 자신의 모습을 담는 것이 경계상태의
자신의 모습을 전달하는데 좀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런 경계의 상태..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장소나 문화의 문제라기 보다는
자신의 의지 문제 아닐까. 굳이 외국이 아니라도, 학교나, 회사 등 어떤 집단에
소속되기 시작할 때,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들 경험하게 되는것 같은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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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궁: 그런데 오늘 본 전시 중에서, 갤러리 그림손에서 있었던 15명의 단체전을 포함해서...
사진작업들이 모두 외국의 이미지-그것도 미국이나 유럽의 모습들인데...
이렇게 말해도 되나..'사대적'인 것 같은 느낌도 들어.

밍: 하긴, 그런 사진에 'XX 해물탕' 같은 간판이 들어있다면 왠지 갑자기 격이
확 떨어지는 느낌이 들 것 같기는 해. 앞서 이예린의 뉴욕 사진에서도 지적했지만,
국제적인 도시들의 이미지에 대한 향수도 사진을 감상하는데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아.

냐궁: 이런 사진들을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궁금해.
우리들이 가지는 느낌하고는 차이가 클 것 같은데..


 

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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