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글에서도 잠시 이야기 했지만,

 

힌두민족주의 운동은 자신들을 지배했던 무슬림 왕조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고,

 

내 주변을 둘러보아도 지지를 보내는 젊은 친구들이 꽤 많다.

 

그러니 모디도 총리를 연임할 수 있었을 터이고.....

 

 

 

이 힌두민족주의가 펼치는 주장이라는 것이,

 

인도의 역사에서 1530~1858년까지 한토막을 차지하고 있는 무굴 제국-이슬람 왕조를

 

인도 역사-힌두/인더스 문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삭제해버린다는 것인데,

 

실제로, 내가 타지마할(무굴제국 황제 샤 자한의 처의 묘) 을 간다고 했을때 "그걸 뭘 보러 가냐" 라는 친구도 있었고,

 

200년동안 식민지배를 했던 영국에 대해서는 아무 감정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래도 영국은 우리를 이슬람에서 해방시켜줬으니까" 라고 대답을 했던 친구도 있었다.

 

 

 

그렇게 이슬람을 인도의 역사에서 침략의 역사로 규정하고 삭제한다고 할 때,

 

그렇다면 힌두 문화의 원류가 되는 아리안(Aryan)족의 침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인도인들, 특히 인두민족주의에서의 생각이 궁금하였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역사적으로 아리안들의 이주와, 이들이 이주하여 만든 베다(Veda) 및 카스트 제도가

 

힌두 문화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침략을 부정하자니 힌두 문화의 근간이 흔들리고,

 

그렇다고 인정하자니 그들의 근간이 외부에서 시작된 침략(혹은 이주)의 역사임을 자인하는 형국이라

 

불편하기는 매한가지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마침 페북에 친구중 한명이 (앞서 그 친구와는 다른) 흥미로운 기사를 올렸다.

 

<당신은 아리안 침략자인가? 피부색에 대한 식민지적 관점이 오늘날 정치적으로 만연해있다.>

 

기사는 한 남부의 정치인이 북쪽의 정치인에게 "아리안 침입자"라고 비난한데에서 시작한다.

 

아리안족 기원설에서는 아리안 침입설 (Arayan Invasion Theory, AIT) / 아리안 이주설(Aryan Migration Theory, AMT)

 

이 있는데, AIT는 식민지 시절 식민지배를 정당하기 위해(아리안족 우월설 식의) 언어학적으로만 본 것이라

 

역사적인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고, AMT는 침입이 아니라 평화롭게 이주/공존했다는 설인데,

 

유전적 연구로 보았을때 지지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론은 아리안족이 이주할(이주했다면) 당시 번성했던 인도의 드라비다 족의 하라파(Harappan) 문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고, 아리안족이 고향에 정착하지 않고 이주할 이유가 없으므로,

 

아리안이라는 종족적 구분은 의미가 없고, 인도는 그당시부터 남북이 하나의 인더스 문화이자 베다(Vedic) 문화로

 

보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는 의견이다.

 

결국 아리아인의 침입/이주설을 부정하고, 그것이 이미 고대 통일된 인도에 내재되어 있었다라는 주장이고,

 

잠시 뒤 이야기하겠지만, 힌두 민족주의/우파의 "아리안"침입/이주에 대한 전형적인 반론이다.

 

 

"아리안(Aryan)"족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 살펴보니,

 

위 기사의 언급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데,

 

우선 19세기에 산스크리트어와 유럽 어족사이의 유사성을 토대로 유럽과 인도의 공통 조상이되는

 

아리아인을 상정한 것은 맞다. 즉 출발이 언어학에서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또한 이 논리가 과거 히틀러의 아리안족의 세계 지배를 정당화하는 식의 인종차별/우월주의적으로

 

활용된 것도 또한 사실이다. 때문에 오늘날에는 특정 인종을 지칭한다기 보다는

 

언어학에서의 어족(인도-유럽어족)으로서의 의미가 더 강하게 통용된다고 한다.

 

다만, 당시 인도의 하라파 문명은 청동기 시대였으나, 베다에는 철기 문화의 언급이 자주 나타나며,

 

베다에 자주 등장하는 말을 타거나, 전차(chariot)를 끄는 모습도 하라파 문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리안인들의 흔적으로, 아리안족 침입/이주설이 단순히 언어적으로만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도 아닌

 

다수 비교 문헌 및 유적등의 발굴과정에서 지지를 받고 있는 이론이라는 점이다.

 

 

 

그러던 중 2018년도에 하버드 대학의 데이빗 리치(David Reich)가 이끈 연구팀이

 

고대인들의 유전정보를 분석하여 아리안족의 이주설을 지지하는 꽤 과학적인 근거를 내놓는데,

 

이로 인해 힌두민족주의의 소위 "아리안 자생설"은 그 근거가 많이 흔들리게 된다.

 

관련된 기사에서 "아리안"을 두고 역사적으로 어떤 입장이 있어왔는지 꽤 재미있게 정리를 했기에,

 

간단히 언급해두고자 한다.

 

The Economist에 실린 <새로운 연구가 인도인의 기원에 대한 소중한 이론에 찬물을 끼얹다>

 

원문은 구독을 해야만 볼 수 있는데, 다행히 한 힌두민족주의자가 데이빗 리치는 사기꾼! 하면서 

 

전문을 옮겨 놓았다.

 

 

1세기 반 전 "인도-유럽-원어(Proto-Indo-European)"에 대한 언어학적 연구와,

 

아리안족의 침입/이주에 대한 이론은,

 

①나치에게는 세계 지배의 정당성을 부여하였고,

 

②영국 식민지배하의 인도에서는 카스트제도와 상위계급의 지배 정당성을 부여하고, (역시 우리가 지배자!)

 

③또 반대로 남인도에서는 드라비다족들의 분리에 대한 주장을 야기하였다. (아리안 침략자!)

 

④한편 힌두민족의자들은 이 이론에 대해 인도의 분열을 노리는 기독교세력과 공산주의자들의 모략이라고

비난하고 "아리안-인도문화의 원류"는 외부에 있지 않고 자생했으며,

이들이 서쪽으로 나아가 서구 문화의 근간이 되었다는 주장을 한다.

(요 지점이 딱 위의 <당신은 아리안 침략자인가?> 가 주장하는 바이다.)

 

 

 

한데 이러한 주장이 데이빗 리치의 연구에 의해 큰 위기를 맞게 되었는데,

 

데이빗 리치의 연구에 대해서는 BBC의 기사에서 꽤 객관적으로 정리를 해놓았다.

 

<고대의 DNA가 인도의 고대사를 다시쓸지도 모른다.>

 

2018년 3월에 출간된 그의 연구에는 세계에서 총 92명의 연구자가 함께 했으며,

 

남아시와와 중앙아시아의 고대 인류의 유해에서 DNA를 분석하였다.

 

이 연구에 따르면 인도에는 두번의 큰 이주가 확인되는데,

 

첫번째는 기원전 7,000~3,000년 사이 이란 서남쪽의 자르고스 지방에서 이주한 농경문화이며,

 

두번째는 기원전 2,000년경 유라시아의 스텝지역에서 이주한 세력이다. 

 

다만 이 연구에서 밝혀낸 점은, 이들이 지금까지 알려진바와 같이 이란 지역이 아닌

 

지금의 카자흐스탄 지방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이다. (그렇다..소련이 세계를 정복한...것이다...)

 

데이빗 리치의 논문중 도판 ①BC7,000년 경 이주, ②BC2,000년경 이주.

 

데이빗 리치의 논문 중 도판 / 녹색 세력이 인도문명의 직접적 조상이다.

 

이 논문은 당연 힌두 민족주의가 득세하던(그리고 지금도) 당시 인도 사회에 꽤 큰 반향을 일으켰고,

 

데이빗 리치를 비롯, 공동 연구자들의 트위터가 테러 당하는 등,

 

힌두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거친 항변이 이어지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객관적인 사실을 조명해야 하는 역사와, 한 나라의 근간과 정당성을 세워야 하는 국사는

 

다소 다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국사에서, "찬란한 우리 반만년 역사"라고 이야기 해야지,

 

"우리 민족은 애초에 쬐끄만 땅덩어리에서 아웅다웅 살아왔어요" 라고 말할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다만, 소위 "국뽕"이 지나쳐 '신화'에서 끝나야 할 것들을 '역사'로 만든다거나,

 

과거의 그릇된 행위들을 정당한 행위로 포장하는(옆 섬나라처럼..) 행위는 당연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중 최악은 자기 생각에 정당하지 못하거나,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거나,국가의 구성원일지라도 - 배제해버리는 행위이다.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들에 의미를 새로이 부여할 수는 있어도

 

그 사건이 발생했었다는 사실 자체는 지워지지 않는다. 

 

 

 

사실 이 논쟁은 인도의 '국사'에 대한 관점에 가까울 것이라

 

외부인인 내가 더 깊게 언급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다만 이미 역사에서 이루어진 것, 그리고 이미 인도의 역사의 일부가 된 것들을

 

그리고 그 후손으로서 현재 인도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을 

 

축출/배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언젠가는 파국적인 사건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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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냐궁
,

 

며칠전 아침신문에 눈길을 끄는 사진이 있었다.

 비접촉식 체온계를 들고 시민의 체온을 측정하는 인도 경찰의 모습.

(인터넷판 신문을 찾아보았으나, 다른 사진이 실려 있어, 해당 사진의 출처는 결국 찾을 수 없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자연스레 너무도 유명한 1968년 에디 에이담스(Eddie Adams)의 <사이공의 처형> 사진이 떠올랐다. 구도나 포즈나, 너무나 유명한 사진이니, 다분히 오늘날의 신문기자가 의도하지 않았을까 싶은 구성이지 싶었다.

 

하지만, 내게 더 흥미로웠던 점은, 두 사진이 권총을(체온계를)겨누고 있는 경찰/군인과

이를 맞는 시민(혹은 베트공)의 구도적인 시각적 유사성과 달리, 내용면에서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었다.

68년의 희생자(?)는 얼굴을 찡그리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반면,

오늘날 인도의 시민은 너무도 당당하게 체온계를, 경찰을 응시하고 있다.

1968년과 2020년이라는 세월을 사이에 두고, 닮은 듯 다른 두 사진을 발견한다는 것은

나를 꽤나 흥분시켰다.

 

이러한 발견은 그리 드문 편은 아닌 것인지, 이라크전 당시 종군기자였던 Sophie Ristelhueiber는 헬기를 타고 이라크 상공을 찍은 전쟁현장의 사진에서, 만레이가 뒤샹의 작품에 내려 앉은 먼지를 찍었던 <Dust Bleeding>을 연상하고 사진이라는 매체가 세상을 보여주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왼편 : <Dust Bleeding>, 만레이, 1920 / 오른편 : <Because of Dust Bleeding>, Sophie Ristelhuiber, 1991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러한 발견을 기쁘게 지인들에게 공유하고자,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리려던 순간,

 잠시 주저할 수 밖에 없었는데, 혹시나, 인도의 지인들이 이 사진을 보고 인도의 공권력에 대한 - 베트남전에서의 즉결처분처럼 - 비판적인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부연설명을 곁들이고, 바이러스와의 싸움 / 이념의 싸움이라는 기본적인 전제가 다르니,

 굳이 그런 불필요한 오해는 하지 않을듯 하여 약간의 부연과 함께 사진을 올렸는데,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우선 한국의 지인이 "저 베트남전 사진의 희생자가 실상 무고한 사람이 아닌 비무장 시민을 학살한 게릴라를 사살하는 사진인데, 사진의 프로파간다가 껄끄러운 측면이 있는건 알고 있느냐" 고 댓글을 달았고, 인도 친구 한명은 "저 사진가가 이 소리를 들으면 까무라치겠는데요?" 라는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사실 다른 인도 친구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는데, 한달에 한번정도 올리는 포스팅에 열렬한 좋아요를 눌러주던 그들을 생각해보면, 분명 이번 포스팅은 거슬리는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위의 지인과도 이야기를 해보고, 다른 인도 친구들과도 이  두 사진의 비교가 그렇게 껄끄러운 구석이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① 대부분은 베트남전의 사진에 대해 모르고 있었고,

 ② 베트남전 사진은 사람이 죽는 사진이고, 인도의 사진은 사람을 돕는 사진인데,

    둘을 비교를 한다는 것은 공감이 가지 않는다.

 

 사실 ②번이 정확히 내가 흥미롭다고 생각한 지점-유사한 형식, 다른 컨텍스트-인데,

 부연설명을 했음에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그 분리가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이유를 추정해보자면, 아마도 부연설명-글을 읽기에 앞서,

 두 이미지의 비교를 통해 아래와 같은 즉각적인 시각적 판독이 일어나는 것 같다.

 

    신문 기사의 사진 : 사람을 돕는 사진   /   베트남전 사진 : 사람을 죽이는 사진

 

 사실 내가 의도한 바는 아래와 같다.

 

   신문기사의 사진 : 총을 겨눈 동작 / 사람을 돕는 사진  / 베트남전 사진 : 총을 겨눈 동작 / 사람을 죽이는 사진.

 

 더불어, 두 사진을 비교하는 내 의도는 역사적 맥락을 걷어내고,

 순전히 그것들의 형식과 내용의 닮음과 다름에서 오는 발견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것이었는데,

 

 두 이미지의 비교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분히 두 사진의 외부의 맥락들,

예를들면 : 베트남전 당시 사진이 전달했던 프로파간다, 인도의 경찰에 대한 대외적인 이미지,

 을 고려하여 두 사진을 비교하고, 의도를 품고 사진을 비교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베트남전의 사진 이미지가 워낙에 강렬하기도 하고,

 또 인도인들은 이 상황의 당사자이다보니 다분히 복잡한 외부의 맥락들 속에서

 사진의 비교를 받아들이게 되고, 일단 한번 이렇게 두개의 사진 비교가 의미화 되면,

 그 이후에 어떤 설명도 처음의 시각적 문법을 뒤집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혹은 읽을 노력 자체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새삼 시각적 문법의 즉각성과 의미 고착의 강력함을 깨달았다.

 

 여기서 딜레마는, 비록 내가 그러한 의도로 올린 것이 아니더라도,

 다수가 나의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을 때, 

 철회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인데, 

 굳이 직접적으로 항의하는 목소리도 없었고,

 또한 당사자들이 아니라 외국인이니까 할 수 있는 비교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양성(?)을 추가하는 차원에서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그리고 결국 소심한 복수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앞서 개인적으로 사진이 불편한지에 대해 물어본 친구들에게는

 충분히 내 의도를 설명을 했고, 대부분은 내 의도를 이해하고,

 굳이 글을 내리거나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고 조언해 주었다.

 

 근데 그렇게 이야기 했던 그중 한명이 결국 뒷통수를 치는데...

 약 6년여간 알고지낸, 나름 친하다면 친한 친구녀석이 있는데,

 약간 힌두 민족주의 / 반중주의 / 친일(?!) 노선을 취하는 친구라,

 종종 힌두우파 테러리즘의 입장에 준하는 글을 보내주기도 하고,

 나는 나대로 질문도 하고, 다소 보편적인 차원의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며,

 나름 그런면에서는 터울없이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친구가 구자라트 지역에서 이슬람 폭동의 역사가 담긴 글을 보내주며

 

 "너는 이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테지만..."

 

 이라고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그게 무슨뜻이니?"

 

 "서구의 자유주의자들은, 모든게 그들(이슬람)에게서 시작되었음은 잊어버리고,

  이슬람을 피해자로 포장하지."

 

 "지금 나보고 그 자유주의자라는 이야기?"

 

 "난 너의 정치성향은 몰라, 하지만 흰것은 희고, 검은 것은 검다고 말해야겠어"

 

 

  나한테 너무 공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냐는 물음에 결국 미안하다고 이야기하긴 했으나,

  

  이것은 분명 상기한 사진 비교에 대한 소심한 복수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였고, 인도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서도 많이 알려준 친구이긴 한데,

  다른 인도 친구들과 교차검증을 해보면 편향이 심하기도 하거니와

  이런식으로 투정을 부릴거라면 관련한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거리를 좀 둘 필요가 있지 싶다.

 

 이상 나름 개인적으로 뿌듯한 발견에서, 시각 문법의 즉각적 독해에 놀라고, 그로 인해 소심한 복수까지 당한 이야기.

 

  

  

 

 

Posted by 냐궁
,

 

<The Darkest Hours>

 

영국이 2차대전에 휘말리던 때의 윈스턴 처칠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개리올드먼이 윈스턴 처칠로 분해 열연을 펼쳤다.

 

작중 언급되는대로 커리어로보자면 재앙에 가까운 처칠이 수상에 오르고,

 

평화협정이라는 카드는 안중에도 없이 독일과의 전쟁이라는 독단적인 선택.

 

역사는 그것이 결과론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고,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긴 하지만,

 

작중에서의 처칠은 그야말로 똥고집으로 가득찬 인물로만 보여지는데....

 

(마지막에 지하철에서 이야기 나누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는 정도..?)

 

히틀러에 대해서는 옳았지만,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는 글쌔...?

 

코로나로 인해 상황이 극단적인 요즘...

 

과연 리더란?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그나저나 릴리 제임스는...정말 이쁘네...

 

 

<What Happend to Monday>

 

무분별한 자원 소모와 기근, 그리고 유전자조작 식물들의 부작용으로 인해

 

산아제한이 실시된 미래에서 7쌍둥이의 투쟁(?)을 그린 영화..

 

볼까말까 하다가 윌리엄 대포에 끌려서....

 

사실상 누미 라파스의 1인 7역 쇼....에 가까운데...

 

(실상 선진국들은 인구절벽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긴 하지만)

 

통제에 대한 주제의식과 적당한 오락성을 버무린 무난한 영화...

 

 

 

 

Posted by 냐궁
,

락다운이 되고..넷플릭스 유튭.. SNS 네트웤 사용량이 폭증했다..고 한다...

 

나도 그 현상에 일익을 보태고 있는 중....

 

엉겁결에 넷플릭스 미드를 여러개 보게 되었다.

 

<Lost In Space>

 

원작이 되는 로빈슨 가족은 본적은 없지만, 게리올드먼이 악역으로 출연했던, 영화판은 극장에서

 

본 기억이 있다. 꽤 재미있게 보았던 것 같은데, 흥행은 그리 좋지 못했었던듯.

 

드라마는 알파 센타우리로 이주하는 우주 개척단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을 시종일관 곤경에 빠지게 하던 준 해리스(스미스 박사)의 역할이 꽤나 흥미로웠는데,

 

거의 배틀스타 갤럭티카의 가이우스 발타급 우주 찌질이 연기랄까....

 

그런데 갑자기 허무하게 사라져버려 조금 아쉽....

 

시즌 1/2를 거듭하며 외계문명과의 조우(?)까지 스케일을 벌려놓았는데..

 

그 수습이 항상 로빈슨가족의 먼치킨급 활약으로 마무리 되어서..슬쩍 김이 빠지는 느낌..

 

(우주선이 폭발했는데, 우주선 뒷편 잔해에 붙어서 우주를

 

부유한다는 설정은 아무리 주인공이라지만...너무하지 않나..;;? )

 

 

<Another Life>

 

볼까말까 많이 고민했었는데, 일단 SF라는 점과, 배틀스타 갤럭티카의 케이티 섁호프가 출연하다는데에

 

흔들려서....시즌1을 몰아보게 되었다. 이분도 뭔가 쎈역할로만 주로 출연하시는 것 같은데...

 

쎄면서 뭔가 고뇌하는 연기에 특화된 것 같은.....

 

배경은 FTL이 가능할 정도의 기술이 발전한 미래.. 외계인과의 조우를 위한 우주 탐사 이야기.

 

주인공을 제외한 주변 인물 설정이 너무 단편적이라서, 

 

주인공 케이티 섁호프 누님이 멱살잡고 끌고가는 드라마.

 

함선 통제 AI로 나오는 '윌리엄'이 주인공에게 연정을 품는 다는 설정이 다소 흥미롭긴했으나...

 

시즌 2는 안보게 될 것 같다.

 

<Nightflyers>

 

왕좌의 게임으로 이젠 거장의 반열에 오른 조지 R.R 마틴의 중편소설 <Nightflyers>를 드라마화 한 작품이다.

 

결론부터 하면 원작훼손이 너무 심하다. 비록 그게 원작자의 의도라고 하더라도...

 

원작 소설은 국내에는 1995년에 SF/호러 소설집 <토탈호러2>에 수록이 되었었고,

(책의 절반정도를 차지하는 중편)

 

최근에 R.R.마틴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삽화를 더해 단행본으로 출간이 된 것 같다.

 

1980년대에 영화화 된 적이 있는데, 원작자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지만,

 

무려 내가 그걸 TV에서 해주는 걸 본 기억이 있다.(EBS였던듯.)

 

토탈호러2를 소장하고 있고, 해당 소설을 타이핑연습겸 일일이 다 치기도 했을정니..

 

나름 팬이라면 팬인터....

 

사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나이트 플라이어호의 선장 에리스 - 여자 과학자 멜린다, 그리고 에리스의 어머니...의 고부갈등이

 

주된 내용이다...ㅡㅡ;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에리스와 멜린다의 관계 설정을 지워버리고, 

 

하운팅(Haunting) 장소로서의 우주선만 강조된다.

 

개개인의 트라우마에 기반한 어느정도 심리적인 공포를 강조하긴 하나 

 

너무 루즈한데다 결정적으로 주요 등장 인물들이 매력이 없다..

 

에피소드 3편까지 보고 더는 안보는 걸로...

 

영화판에서는 마지막에 우주선을 폭파해버리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래도 에리스와 멜린다의 관계설정에 있어서는..차라리 그쪽이 원작에 충실했던듯...

 

 

 

 

 

 

 

 

 

 

 

Posted by 냐궁
,

Her / Tau

이것저것/영상물 2020. 4. 7. 02:21

넷플릭스 구독 기념(?)으로 간만에 영화 두편을 봤다.

 

우선 그 전부터 보고 싶었던 스파이크 존즈의 <Her, 2013>.

 

영화의 배경 중 상당 부분이 상해에서 촬영되었는데, 예전에 마이클 윈터보톰의 Code46에서도

 

상해를 배경으로 근미래의 모습을 설득력있게 그려냈었는데, Her에서도 저기가 어딜까 싶을 정도로

 

상해의 모습이 미래적으로 그려진다. 상해가 여러가지로 영감을 주는 도시는 맞는듯..

 

이야기의 한 축으로 인간과 AI의 성적 교감이 있는데, 왜 꼭 관계의 결실은 그런것으로 나타나야 하는걸까..

 

지극히 서양적 사고거나, 혹은 내가 그런쪽에서 너무 멀리 있거나...

 

 

Tau는 그냥 거의 랜덤으로 골라본 영화였는데...

 

출연진에 게리올드만이 있는 것을 보았었는데..목소리 출연이었다...;

 

영화는 그냥 비디오물 수준...

 

 

두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건,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AI,

 

그리고 그 AI들이 꽤나 본인들의 취향과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인공지능/혹은 로봇으로 가져야할 선이 없거나, 매우 모호하거나,

 

혹은 그것을 극복하는데 큰 장애가 없다는 점인듯.

 

<I robot, 2004> 당시만 해도 로봇, 인공지능의 자의식과 인류와의 공존이

 

상당수  SF영화들의 화두였던 것 같은데, 새삼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있는 것 같다.

 

 

Posted by 냐궁
,

 

인도를 여행하던 이탈리아 여행객과,

두바이에서 홍콩사람들과 접촉한 인도인-이 인도인은 내가 있는 도시에서-이

Covid19에 감염되었다는 어제자 보도.

그리고 한국인에 대한 비자 무효 선언으로...

사실상 한국인이 인도에 입국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졌다..

(나도 나가면 못들어오는...)

 

 

그리고 오늘, 내가 일하는 곳 4km 남짓한 곳에서..

우리로 치면 판교 테크노밸리 같은 곳에서 또 한명의 확진자 발생.

내가 일하는 도시에서도 이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

 

순식간에 마스크와 손세정제는 품절이 되었고..

분명 발병은 이탈리아 여행객과 인도 사람이 했는데..

마트에서 사람들이 나를 피해다니기 시작한다...;

물건을 고르다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 자리를 옮긴다거나..

계산대에 새치기가 일상인 나라에서...

내 앞의 사람들이 스스로 빠져나가기 시작...;;

흘끗흘끗 쳐다보며 입을 막기도 하고...

 

이봐이봐...발병은 인도사람이랑 이탈리아 사람이 했다고....

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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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랄딘 맥커린|그림 데이비드 파킨스|역자 최인자|웅진주니어 |2006.09.28

원제 Gilgamesh the hero

페이지 142|ISBN 9788901060415|판형 A4, 210*297mm

 

멀리 나오다보니, 아이들 읽을 책이 꽤 광범위하게 필요하다고 해서,

아이들이 지금 당장 읽을 책부터 꽤 나이가 찬 이후에 읽을 책까지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장장 150여권을 구입했더랬다. (덕분에 플래티늄 회원됨...)

 

그중에 하나가 웅진에서 나온 길가메시였는데,

큰 딸이 신화를(그리스 로마신화지만..) 꽤 좋아하기도 하고,

길가메시를 소재로한 재창작물로는 자주 접했으나, 길가메시의 원래 이야기에 대해서는

한번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기에, 나도 읽어볼 겸 해서 책을 골랐다.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길가메시 서사시를 재구성한 것이라고 하는데,

글밥이나, 내용이 거의 어른들용이라고 해도 무방할 수준이었고,

원전의 문학성과 더불어 책 자체의 혹은 번역의 문학적 퀄리티가 상당한 듯하다.

 

읽고 난 느낌은.. 인류 최초의 서사시에서 인류 마지막 서사시를 쓴 느낌이랄까.. 

초월적인 영웅에서 필멸을 면하고자 발버둥치는 고뇌하는 인간으로,

그리고 죽음에서의 귀환 후 삶의 의미를 깨닫는 그 과정이 너무도 생생하여

수천년전의 사람들도 삶에 대해 벌써 이런 깨달음을 이야기 하고 있구나 하는

숙연한 기분마져 들었다.

 

내가 먼저 눈으로 한번 읽고, 아이가 읽어달라고 해서 다시 한번 읽고 있는데,

길가메시와 엔키두가 나누는 대화 사이사이의 복선에 목덜미가 쭈뼛하다.

 

"죽을지도 몰라"

 

"설마 둘에게 모두 나쁜 일이 생기기야 하겠나"

 

<죽음>이라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과연 길가메시는

어떤 대답을 하고 있는지, 기회가 된다면 좀 더 자세한 원전을 한번 찾아봐야겠다.

 

 

 

 

 

....... 그러고보니 여기 힌두의 신들의 이야기도 한번 찾봐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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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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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보면 이제 곧 나가는 마당에, 한번만 참았어야 했나 싶지만,

 결국 참지못하고 터져버렸다. 제사상 앞에서 애꿎은 피아노를 걷어차며 거칠게 항변했다.

 

 "아버지 제발 그만 좀 하시라고요!"

 

 얼마전부터 빈도와 수위가 점점 더해지던 손주 타령.

 손녀들 앞에 두고 대가 끊기게 되어 조상볼 면목이 없다는 말에

 오늘은 확실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덩달아 숨을 몰아쉬며 화를 내시던 아버지.

 

 돌이켜보면, 그 분노의 원인이 아들이 갑자기 격렬히 저항한 것도 있겠지만,

 하필 아들이 그렇게 무례하게 군 것이 조상들을 모신 제사상 앞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대학원에서 공부도 하시고, 고위공무원까지 지내신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의 조상에 대한 유별난 집착이, 단순히 예나, 효의 차원을 넘어

 말 그대로 종교적 의식이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되었다.

 아버지께 조상이라는 것은 이성을 넘어 원초적인 공포 혹은 운명을 좌우하는

 미지의 초월적인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30여년의 세월을 두고, 나는 극단적인 이성의 세계에 살고 있다.

 물질적인 인과율을 바탕으로 매사에 효율성과 효과성을 따져가며 결정하는 세계.

 그런 내게 조상이란, 무시하자니 관습과 사회에 맞서 소모해야 할 에너지가

 너무도 크기에 적당히 따라줘야 할, 그리고 최근에 보자면,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기에 적당한 효용성을 지닌 하나의 소재나, 재료일 뿐인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둘다 화해의 제스쳐는 없었지만, 일은 그렇게 또 덮어졌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가는 아들네를 공항까지 따라와 살갑게 맞아주셨고,

 출국장으로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때까지 손을 흔들고 계셨다.

 

 

 

 

 

 

 

 

 

 

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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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로...

주저리주저리 2019. 9. 11. 00:07

아마도 별 이변이 없으면 내년 초에 인도로 가서 약 4년을 보낼 예정.

 

처음 도전 했던 것이 2015년이니 약 4년 만에 바램을 이룬 셈.

 

막상 왜 인도일까 생각해보면 끌리는 데는 이유가 없다던가...

 

혹은 나름대로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했던 것 같다.

 

40이 되기 전에 인생의 이정표를 한번쯤 틀어보고 싶었는데,

 

생각했던 것 보다 조금 늦기는 했다. 

 

게다가 이정표가 돌려질 만큼의 계기가 될지 살짝 걱정도 되고..

 

아이들이야 어디서든 잘 적응한다지만, 아내에게는 살짝 미안한 마음도,

 

그리고 나나 아내에게 소중한 경험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막상 간다고 생각하니 이것 저것 알아보고 고민할 것들이 많아지네...

 

그래도 행복한 고민이겠거니....

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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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어린이 미술관 방문을 핑계로..(정작 아이들은 별로 가고 싶지 않아했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을 방문했다. 

(접근성이나, 주변 분위기나 난 여전히 서울관보다 과천관이 더 정이 간다..)

아이들 때문에 아내와 번갈아서..빠르게.. 전시를 훑었다...30분씩..--;

진행중인 전시는 <문명:우리가 사는 법>, <김중업 다이알로그>, <박이소:기록과 기억>.

규모나 방식으로 보아 셋다 꽤 신경 썼을 것 같은 전시였고,

프레임을 짜서 전시물을 공간에 띄운 배치는 과거에도 시도된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꽤 재미를 본 것인지 <문명:우리가 사는 법>, <김중업 다이알로그>에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전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아니 전시와 관련은 있는 것이지만...

<문명:우리가 사는 법>은 8개의 주제를 두고 루즈하게 엮인 수백점의 사진이 전시된 형태인데...


전시의 내용을 떠나 한방 두드려 맞은 느낌이 들었던건 사진들의 유사성, 혹은 익명성 때문이었다.

상당수의 사진이 흔히 유형학적 사진으로 (이게 결코 맞는 표현은 아닌 것 같은데?) 분류될법 했고,

약간 먼발치서 사진을 보면 그 방면의 거장들의 이름이 저절로 떠오르는..


내게 주어진 시간은 30여분, 사진 한장당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수초. 

아..이건 딱 누구 느낌이네? 아니네 모르는 사람이네..

이 사진은 같은 작가 사진인가? 아니네 다른 작가네..

사진 개개로 보면 기술적으로 완벽하고, 또 내적인 외적인 형식적인 의미화가 분명 있겠지만,

수십/수백장이 모여진 이곳에서는, 그리고 수초만에 눈앞에서 스쳐가는 이곳에서는

철저히 동질성과 익명성에 가려진 구분되지 않는 사진들.


결국 스스로에게 다가온 물음.

내노라하는 사람들이 치열하게 이렇게 서로 구분되지 않는 사진을 찍고, 결과물을 내고 있는데

과연 나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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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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