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는 <The Devil All The Time>.

 

악(마)은 언제 어디에나 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 듯하다. (느낌이 살짝 다르다.)

 

영화는 종교와 성의 광기와 폭력, 그리고 복수에 대한 이야기.

 

극중에 찬송가가 나오는데, 곡조와 가사가 낯이 익다.

 

 

 

<Are You Washed In The blood>

 

Have you been to Jesus for the cleansing power?

Are you washed in the blood of the lamb?

Are you fully trusting in His grace this hour?

Are you washed in the blood of lamb?

 

[Chorus]

Are you washed in the blood,

In the sould cleansing blood of the Lamb?

Are your garments spotless?

Are they white as snow?

Are you washed in the blood of the Lamb?

 

 

찬송가 193장 <예수 십자가의 흘린 피로써>

나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지역 배정으로 기독교 재단 고등학교에 진학했었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박자에 맞춰 박수까지 쳐가며

하루에도 몇번씩 이 노래를 불러야만 했다.

 

노래를 들어보면 알겠지만, 피로 죄씻김을 한다는 섬뜩한 가사와 다르게,

노래가 꽤 뽕기가 있다. (영화에서도 컨트리송 느낌이다.)

 

교원 임용이 되려고 해도 교회를 다녀야했고,

교직원중 다수는 장로, 전도사, 목사 등등의 직함을 갖고 있었고,

학급임원이 되고자 해도 거짓으로라도 집근처 교회 이름을 적어내야했었다.

 

수업시간에 졸아도 마귀역사, 친구와 장난을 쳐도 마귀 역사...

 

친구들의 영향으로 7-80년대 Rock음악에 눈을 떠가던 내게

Sex pistols의 <Arnachy In the U.K>의 첫마디  "I am an anti-christ!" 가 

고등학교시절 내게 좌우명처럼 되어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찬송가를 부를때마다 등장하는 예수는 모두 마귀로 은총이나 은혜는 모두 죄악으로

가사를 바꿔부르곤 했었고, 그모습을 본 독실한 친구(지금은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다)는

(타락한?)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기도 했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짧은 노래 한소절이지만

결국 영화가 던지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종교를 빙자한 광기이든, 혹은 지극히 본능에 충실한 욕망이든,

 

자신이 저지른 죄는 자신의 피로 죄씻김을 할터이다.

 

다만, 어쩌다 심판자가 되어버린 주인공은 자신의 손에 묻힌 피를 어떻게 씻을 것인가..?

 

궁금증을 남기며 영화는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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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냐궁
,

책 vs 영화.

 

마침 책꽂이에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이 보이고,

넷플릭스에 이안 감독의 <이성과 감성, 1995>가 보이길래,

소설을 읽고, 영화를 감상하였다.

 

우선 원제 <Sense and Sensibility>에서 Sense가 통상적으로 쓰이는 "지각"이 아니라

"이성"으로 번역된 것이 의아하여 찾아보니, "S"ense and "S"ensibility 로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처럼 제목에 묘를 더했다는 의견도 있고,

당대에는 문학적으로 "Sense"를 이성(Common Sense의 맥락에서의)의 문맥에서

많이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쪽이든, 영문학자들이 고민해서 내놓은 번역일테니 그렇다 치고..

 

소설과 영화의 비교는 조금 이따가 하도록 하고,

우선 소설을 읽으면서 책에 등자하는 시대적 윤리관에 대해서 많은 의문이 들었다.

소설은 한마디로 하면 영국 중산층(젠트리..니 사실상 귀족) 자매의 결혼 대작전인데,

지적이며 사려깊은 언니인 "엘리너"와 감정적이고 열정적인 동생 "메리앤" 둘을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 된다.

 

여기서 문제는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남자들인데, 하나같이 문제투성이인 남자들이다.

엘리너와 맺어지는 에드워드는 사정이야 어쨌든 양다리를 걸쳐 두 아녀자를 희롱하는 인물이고,

메리앤과 썸을 태웠던 존 윌러비는 바람둥이에 난봉꾼이며,

결국 메리앤과 이 되는 브랜든 대령은 품성으로는 더할나위 없는 인물이나, 

한때 사랑했던 여인의 사생아를 거두어 키우는 비밀을 품고 있다.

 

소설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이 남자들, 특히 에드워드와 윌러비에게 면죄부를 주는 과정인데,

에드워드는 양다리중 한명이었던 루시가 빈털털이가 된 에드워드를 버리는 속물적인 선택을 통하면서

자동으로 엘리너를 사랑할 수 있는 면죄부를 받게 되었고,

윌러비는 메리앤한테는 진심이었는데, 부득이한 현실때문에 다른 선택을 해야만 했었다는 식.

 

"통속적인 관념을 피하고자 하는 통속적인 관념에 사로잡힌" 정도의 결코 통속소설 치고는 꽤 지적이고

 다층적인 심리묘사가 넘쳐나는 책의 맥락으로 볼때, 단순히 젊은날의 실수나, 상대방의 배신, 혹은 순수했던 감정

따위로 위 남자들의 과오가 덮여질리 만무한 것은 작가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지 않았을까 싶은데,

굳이 저 남자들에게 형식적으로라도 핑계거리를 주어야했던 까닭은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사실 아연실색했던 장면은 윌러비의 고백을 전해 듣고 매리엔이 마음의 짐을 더는 - 윌러비를 용서하는- 장면.

물론 그런 고백 따위로 윌러비의 잘못이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엘리너의 단서가 붙긴 하지만.

(이런 점에서 볼때 확실히 엘리너는 작가의 분신인 느낌이 강하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요즘 소설 같으면 엘리너와 브랜든 대령이 맺어지는 전개가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긴했다.

 

이제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면,

감독이 대만 출신의 이안감독인지라, 과연 서양의 고전을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했는데,

크게 모험하지 않는 방향으로 원작에 충실하게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겼다.

에드워드에게 면죄부를 주는 설정도 여전하고,

다만 윌러비가 내사랑은 메리앤 뿐이었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삭제되었다.

아무리 원작에 있다지만, 아닌밤중에 찾아와 진심을 고백하고, 매리엔이 안도하고,

그리고 브랜든 대령과 결혼하는 이야기를 설득력있게 화면에 옮기기는 매우 힘들었을듯.

 

책에서도, 영화에서도 충실히 묘사되고 있는

에드워드가 루시와 헤어졌다는 이야기에 기뻐 어쩔줄 모르는 엘리너...

만약 옆에 있었다면 한마디 속삭여 주고 싶은 한마디.

 

"이봐 엘리너, 당신은 좀 더 가치있는 사람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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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냐궁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악의 무리들의 활극 앞에 무기력한 노인(?)의 모습을 열연했던 토미 리 존스가

 

노인비하(?)에 다소 아쉬움이 남았던 탓일까?

 

노익장을 발휘해서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를 만들었다.

 

서부의 극심한 역병과 기근, 그리고 가정 폭력으로 정신이 나가버린 3명의 마을 아낙들.

 

그리고 이들을 치료하기 위해 아이오와까지 장도에 오른 여장부 커디(힐러리 스웽크)

 

그리고 커디덕에 목숨을 구하고 이들을 아이오와까지 운송할 부랑자 브릭(토미리 존스)

 

영화는 3명의 아낙의 비참한 삶의 모습, 그리고 남편/아버지들의 만행을 비추며

 

이들의 정신 이상이 단순한 역병이나 기근이 아닌

 

남성들의 폭력에 의한 것이라는 암시하는 동시에

 

커디와의 여행에서 이들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한다.

 

하지만 커디가 자신의 순수한 도덕관에 스스로 무너져 극단적인 선택을한 그 순간부터

 

영화는 이 척박한 서부에서 여자가 설 곳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브릭이 커디에게 일말의 죄의식과 의무감을 느끼는가 싶었지만, 

 

결국 커디가 남긴 돈이 탕진되는 순간, 다시 원래의 탕아로 돌아가는 결말.

 

그렇지 결국 사람 고쳐 못쓴다고 했던가.

 

 

 

시종일관 클리셰를 비틀면서 언뜻 여성주의 영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관찰자이면서 이들을 구원(?)해내는 남성중심 서사로의 귀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어도,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덧1. 처음에 다소 찌질한 모습으로 등장했던 토미 리 존스가 극중 어느 순간부터는 

 

목소리부터 진지함이 깔린 모습으로 등장한다. 역시 주연이라....

 

 

덧2.  힐러리스웽크가 퇴장하는 순간.. 왠지 모를 토미 리 존스의 주연 욕심인가 하느 느낌이 들어

 

쓴웃음이 절로.. :) 

 

 

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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