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인도는 코로나로 한참 혼란스럽다.

대부분의 외국계 회사들이 재택근무로 전환하여 업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우리 회사(특히 설계) 업무 특성상, 재택이 제한이 많고,

또 한국 회사 특유의 근성(?)이 발휘되어 60% 정도로 조를 짜서

교대로 출근하며 업무를 하고 있다.

 

얼마전 상황이 더 악화될 경우를 대비하여 100% 재택근무시 발생하는 문제점 및

근태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의외의 쟁점이 나타났다.

 

쟁점 : (재택 근무 기간 중) 연구소가 위치한 도시를 벗어나는 경우 재택근무로 인정 되는가?

 

- 반대 입장 :1. 인도 특성상, 고향방문을 허용하면 집이 지방인 친구들은 다들 빠져나갈 것이다.

                2. 혹여 급하게 회사에 나와야할 수도 있는데, 못나올 수 있다.

                3. 말이 재택이지, 고향간다는 건 업무를 안하겠다는 의도가 크다. 

 

- 찬성 입장 :1. 호스텔(우리로 치면 고시원)에서 지내는 친구는 차라리 고향집이 안전할 수 있다.

                2. 필요한데 못나오게 되면, 그때 거기에 대해 페널티(재택 근무 불인정 = 개인 휴가 사용)를 주면 된다.

                3. 결과로서 책임지게 해야지, 의도로서 규제하는건 옳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입장이었는데, 인사를 포함하여 의외로 많은 주재원들이 전자(반대)입장을 표명했고,

결국 재택 근무시에 이 도시를 벗어나는 경우는 모두 근무 인정이 안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놀랐던 많은 주재원들의 인도 직원들에 대한 인식.

 

"핑계만 대고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한다.",

"한 번 두 번 호의를 베풀면, 결국 뒤통수를 친다",

 

 물론 나도 기사로 속을 썩어보기도 하고, 이곳 사람들 일하는 것이 영 미덥지 못하다는 것을 알긴 하지만,

 그래도 회사 직원들이 그렇게까지 사람을 속이거나,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것은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

 사실 위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아니 이녀석이!" 하고 나쁜 의도를 가진 것으로 알고 오해했다가,

 나중에 그것이 아닌 것을 알고 부끄러운 적이 몇 번 있어서, 가급적 의도에 대해서는 미리 짐작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주어진 제도나, 환경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려는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국의 직장 문화에서는 개인이 다소 손해보면서 사는게 편하다는 듯한 분위기가 있고,

 그것이 조직생활의 매너 혹은 관례로 인식되는 반면, 이곳에서는 그것이 허용하는 한계를 두드려 보는

 일이 종종 있다는 정도? 대부분 원칙과 납득할만한 설명을 해주면 두드려 보고 아님 말지 하는 식으로

 수긍하고 돌아선다.

 

 그리고 드디어 문제가 생겼다.

 오늘 결국 점점 좋지 않아지는 상황에 다음주부터 2주간 재택근무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고,

 문제는 이미 휴가를 쓰고(근태 인정이 안되기 때문에) 고향에 내려간 친구들의 다음주 근태였다.

 

 쟁점 : 어차피 재택인데, 굳이 회사가 위치한 도시로 돌아와서 재택을 해야 하는가?

 

 돌아와야한다는 입장 : 1. 예외를 인정하면 끝이 없다. 악법도 법이다.

                              2. 도망간 애들이다. 봐줄 수 없다.

 

 돌아올 필요 없다는 입장 : 1. 고향집이 더 안전할 수 있다. 연구소 근처의 고시원보다..

                                   2. 고향집/연구소 소재 도시, 어디서 재택을 하든, 현실적으로 무슨 차이인가?

 

결국은 악법도 법이라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고, 이곳으로 돌아와야만 재택 근무가 인정이 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나는 이제 이곳 생활 6개월이고, 이곳에서 1년 이상 생활한 그들의 경험치를 무시하고 싶지는 않지만,

의도를 짐작하여 행동을 규제하고, 실질적인 업무효율이나, 개인의 안전과 상관없이 규제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의문이 남는다. 졸지에 도시를 벗어날 계획이 있는 친구들은 업무를 하지 않을 의도를 

지닌 친구가 되었고, 이런 저런 사정으로 고향에서 업무를 해야만 하는 친구들은 공식적으로 비업무 상태가 되어

업무지시를 하기도 애매한 상황 - 실질적으로 전력이 이탈하는 상황이 되었다.

 

다수의 불순한 의도를 경험 → 의도를 짐작하여 규제함 → 결국 집단을 해당 의도를 가진 집단으로 정의.

 

결국 이 과정에서 불순하지 않은 의도를 가진 사람은 설자리가 없어지고,

구성원 모두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으로 남게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더욱더 중요한 것은, 당장의 불순한 의도를 가진 몇 사람을 골라내기 위해서,

다수의 그렇지 않은 직원들의 신뢰를 잃어가는 것은 아닐까.. 

당장 몇사람 더 출근시키겠다는 욕심이, 장기적으로는 직원들의 낮은 충성도로 이어지지는 않을지,

(이미 이 시국에 출근하는 거의 유일한 회사...)

여기서 내가 어떻게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 같지만...걱정스럽다.

 

 

Posted by 냐궁
,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배경으로 전쟁을 이기고자 발버둥치는

 가상의 미군 장성 글렌 맥마흔의 노력을 그린 블랙코미디 영화.

 빵형 브래드피트의 연기 변신이 볼만하고, 

 현대전에서 단순한 병력간의 교전이나 작전 수행이 아니라

 정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나름 특별한 영화.

 

 (사실 글랜 맥마흔은 실제 아프간 해방전을

 이끌었던 스탠리 매크리스털을 이름만 바꾼 것에 불과하다.)

 

 과장된 글렌 맥마흔의 연기를 보면, 분명 블랙코미디가 맞기는 한데,

 또 주인공의 고뇌를 함께 그리고 있어서.. 이게 마냥 웃어야 할지 공감해야 할지

 피아식별이 확실하지 않아 영화적인 재미는 다소 떨어지는 편.

 

 다만 이 영화를 두고 글을 좀 펼쳐볼까 하는 이유는,

 글렌 맥마흔 같은 리더가 우리 주변에 의외로 많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글렌 맥마흔은 군인집안에서 태어나, 사관학교, 레인져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아

 이라크전을 성공전으로 수행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장성임에도 매일 아침 십수키로를 뛰고,

 하루에 4시간 취침하고, 병사들과 같은 수준의 숙소에서 머물며, 자기 전에는 경영서를 읽는

 경력으로 보나, 자기 관리로 보나, 평판으로 보나 나무랄 것이 없고,

 이번 아프가니스탄만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다면 경력의 정점을 찍을 수 있는 상황을 앞두고 있다.

 

 우리 주변에도 이같은 리더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볼 수 있다.

 "나는 새벽 6시에 출근해서 업무를 준비한다" 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던(=너그들도 열심히 해라!) 부회장님도 있었고,

 매일 아침 6시 출근은 물론이고, 자기 개발을 위해 주말이면 도서관에서 살던 팀장님도 있었고,

 실무자들보다 더 디테일하고 정확하게 실무를 꿰고 계시던 부사장님도 있었다.

 이들이 이룬 업적을 폄하하거나, 내가 그들보다 낫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고, 

 왜 이들이 내 기억속에 "그리 좋지 못한 리더"로 남아있는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왜 실패했는지,

 주인공 글렌 맥마흔은 그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아프간전에서 승리하지 못했는지, 이 영화는

 한 기자의 입을 빌어 이야기 한다.

 

 "장군님의 좋은사람이라는 건 알겠어요, 의도의 선량함을 의심하는 건 아니에요,

 제가 의심하는건, (당신이 정말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자아 의식이 의심스럽다는거에요"

 

 "이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사람과 다른 점은, 현실을 외면하는 능력이 정말 뛰어나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광기라고 부른다."

 

리더는 선지자나, 예언자가 아니다. 물론 빌게이츠, 스티브잡스, 엘런머스크처럼 비젼을 열어가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매우 한정적인(그리고 운과 재능이 겸비한) 경우일뿐이다.

극 중 맥마흔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위한 자신의 야망을 이렇게 역설한다.

 

 "완벽한 군사력과 작전 능력만으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우리 이상(ideal)의 완벽한 힘과 능력으로만 승리할 수 있어"

 

 도대체 "이상(ideal)"이란 무엇인가? 정치인이 나서서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고 외치면

 살기 좋은 나라가 만들어 지는가? 기업인이 나서서 "세계 1등 제품을 만들겠습니다" 라고 외치면

 세계 1등 제품이 만들어 지는가? 자신의 역량(이것은 단순히 리더 개인이 얼마나 뛰어난가와는 다른 문제이다.)과

 처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고 외치는 것은 그저 이룰수 없는 꿈이거나,

 단순히 구호성 외침으로 끝날 뿐인 것이다.

 

 게다가 이와 같은 리더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은 "의도의 선함"이 결과의 선함을 보장한다고 믿거나,

 혹은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비난을 피해갈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목적하는 선함의 구현을 위한

 과정에서 수단의 정당성의 결여를 (흔히 "창조적인"이라는 미명하에) 묵인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결국 글렌맥마흔은 병사 3만을 추가로 받아 이들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점령지역 사지로 몰아넣었고,

 결국에는 자신이 벌인 작전의 끝을보지도 못한채 쫓겨나야했다. (실제로는 본인이 이 전쟁의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일부러 스캔들을 만들어 해고를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우리 주변에도 흔히 현실인식이 결여된 허울 좋은 이상을 위해 구성원들을 사지로 내모는 리더들을 본다.

 본인들이 성실하고 뛰어나기 때문에 구성원들도 모두 그러하리라 믿고 구성원들에게 자신처럼 일할 것을 강요하며,

 자신과 같은 이상을 가지기를 바란다. 심지어는 적군조차 자신의 이상에 동조할것이라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극중 아프간에서 우리의 임무가 무엇인지,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모르겠다는 병사의 질문에 글렌은 이렇게 답한다.

 

 "그럼 자네는 자신부터 이해시켜야겠군"

 

 그리고, 이들의 이상을 한꺼풀 벗겨보면, 사실은 그 이면에 "성공 혹은 명예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본다.

 물론 사람의 욕망이 단편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진짜 인류에, 혹은 구성원 집단에 기여하기 위한 선함인지,

 아니면 단순히 개인의 출세를 위한 야욕인지, 혹은 둘다이지 명확하게 구분되지는 않겠지만,

 이것을 분리하지 않으면, 아니 최소한 분리하려는 노력이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외면하기 쉽다.

 즉, 욕망에 눈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아프간 전쟁은 장군의 이력의 정점에 있고, 장군님의 야망을 이해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장군님의 개인의 야망이 망상이 되지 않고, 납득하지 못할 비용(댓가)이 들지 않도록

  검증하는게 (기자로서)제가 할 일입니다."

 

 

 인도에 오기 전 주재원 수업을 들으며, 좋지 않은 인사말의 예라며 배웠던 문장이 있다.

 

 "I'm here to Lead, not to be led."

 (나는 여기 지휘하러 왔지, 지도를 받으러 온게 아닙니다.)

 

 어쨌거나, 이곳의 현실은 나를 리더로 인식하고 있고,

 나를 걱정반, 기대반으로 바라보는 60여명의 시선과,

 "위대한 이상"을 위해 충성하라는 회사 리더들의 요구가 있다.

 과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고, 이들을 어디로 데리고 갈 것이며,

 이들은 무엇을 느낄것이며, 내 위의 리더들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할 것인지..

 고민이 깊어진다.

 

 

 

  

 

 

 

 

 

Posted by 냐궁
,

나름 잘나가는 배우들의 재능낭비 시리즈...

 

▶불렛헤드(Bullet Head, 2017)

 

애드리언 브로디, 존 말코비치, 안토니오 반데라스....

배우 이름들만 들어도 뭔가 기대를 하게 하는데....

어쩌다 창고에 갇힌 도둑들이 각자 자기 인생이야기를 한다는 옴니버스적인 컨셉은 알겠는데....

각각의 이야기가 개연성이 전혀 없고, 결국 동물을 사랑합시다로..마무리..

 

▶브라이트(Bright, 2017)

 

윌스미스, 조엘 에저턴, 누미 라파스...

인간과 엘프와 오크가 공존한다는 컨셉과 그들의 계급관계를 놓고

미국 사회를 풍자하는 요소가 강한 것 까지는 괜찮았는데...

누미 라파스 누님은..영어가 부자연스러워서 거의 대사가 없는걸까...

역시 데이비드 에이어의 10% 부족함이 느껴지는...

 

▶리젼(Legion, 2010)

 

폴베타니, 데니스 퀘이드...

 

폴 베타니를 처음 영화에서 본 건 도그빌에서 우유부단한 모습의 톰 역할...

선해보이고 약간 샌님 같은 이미지 때문인지 도그빌이나, 마스터앤 코맨더(2003), 뷰티풀마인드(2001) 에서

항상 학자 내지는 유약한 모습의 조연으로 등장했었는데, 그런 본인의 모습에 대한 컴플렉스때문인지..

주연급이 된 이후로는 항상 쎈 역할을 선호하는 느낌이다...

동명의 국내 만화 프리스트를 모티브로 한 프리스트(2011)에서도 그렇고, 이번 리젼도..같은 맥락에 있는 작품...

데니스 퀘이드의 연기는 나름 좋았는데.. 그러나저러나 영화가 망작이라...

 

Posted by 냐궁
,

우선 짤막하게 영화 소감부터..

 

▶사보타지 

멕시코와 연결되면 영화가 쓸데없이 잔인해지는 경향이...

데이비드 아이어 감독은.. 제법 큰 영화들을 따오는 것 같은데..

<Fury>가 가장 괜찮았던 것 같고, 항상 5~10%정도 아쉬운 것 같다...

 

▶세이프 하우스

 덴젤워싱턴과 라이언 레이놀즈, 두 배우의 이름을 보고 선택.

 라이언 레이놀즈가 썩 영화 보는 눈이 좋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 역시나..

 덴젤워싱턴은 결국 츤데레라 카더라....

 

 ▶웰컴 투 더 펀치

 역시 제임스 맥어보이와 마크암스트롱의 이름을 보고...

 군무를 연상시키는 첫장면의 은행털이(?)로 시선을 확 잡더니..

 딱 거기까지...

 

 

 범죄/액션영화들을 보다가 문득 든 생각.

 물론, 주인공이 남자인 탓도 있지만, 영화속의 여성들은 (심지어 경찰임에도) 대부분 희생자로서

 혹은 벌어지는 압도적인 사건들 속에서 무기력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것.

 

 <사보타지>의 캐롤라인 형사는 압도적인 사건과 스케일에 무기력한 모습+관찰자적 시선으로 나타나고,

 (이는 시카리오에서의 케이트(에밀리 블런트)도 마찬가지)

 <세이프 하우스>의 CIA 부장인 캐서린도 남정네들의 음모에 어이없게 희생되고,

 <웰컴 투 더 펀치>의 호크스 경위도 죽어서 주인공을 돕는 신세가....

 

 범죄/액션 영화들이 아무래도 마초적인 성격이 강해서 그럴 수도 있겠고,

 또 그런 영화의 소비층이 대체로 남성들이니 다분히 소비자의 취향일수도 있겠다.

 역으로 사보타지나 시카리오처럼 이 영화의 폭력과 박력은 "여자는 감당할 수 없어!" 라고

 얼마나 설득력있게 묘사하느냐가 이 장르들의 작품성을 담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다만 시대가 달라지고 있으니,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남성들의 상대적 강인함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적 역할이라는

 범죄 영화 속의 여성의 클리섀를 살짝 비틀어 본다면

 꽤 재미있는 시도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Posted by 냐궁
,

가족들은 잠시 한국으로 들어가고,

혼자 집에서 넷플릭스를 다 봐버릴 기세로 보고 있지만,

확 땡기는 영화도, 그리고 그렇게 여운이 남는 영화도 많지는 않다.

그 중에 하나 건졌다 싶은 영화 <드라이브>

 

영화를 보다보니, 2017년 <베이비 드라이버>가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는데..

타고난 운전 실력의 주인공, 그리고 여자 주인공의 분위기..

아마 일부 장면은 후자에서 일종의 오마쥬로서 사용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반면 전체적인 영화의 분위기나 속도감은 전혀 다르다.

라이언 고슬링의 지배적인(?) 영향력 행사가 아닐까 싶은데....

전반적으로 호흡이 느리고, 절제된 음향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사실 이야기 자체는 상투적일 수 있는 내용인데,(범죄/불륜/순애보)

이걸 이렇게까지 조마조마하게 풀어낸 감독과 배우에게 찬사를...

 

니콜라스 빈딩 레픈의 최근 작인 네온 데몬도 찾아봐야겠다.

 

Posted by 냐궁
,

2020.06.28

휴지통/No brain 2020. 6. 29.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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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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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newyorker.com/magazine/2020/01/13/the-equality-conundrum

 

The Equality Conundrum

We all agree that inequality is bad. But what kind of equality is good?

www.newyorker.com

좋은 글.

 

번역본은 newspeppermint.com/2020/05/07/m-equality1/

 

평등이라는 수수께끼(1/3)

마이클과 안젤라 부부는 이제 쉰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지난 몇 년 사이 지인 중 두 명이 암과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고, 이를 지켜본 부부는 아이들에게 유산을 어떻게 나누어 주어야 할지 �

newspeppermin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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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냐궁
,

앞 글에서도 잠시 이야기 했지만,

 

힌두민족주의 운동은 자신들을 지배했던 무슬림 왕조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고,

 

내 주변을 둘러보아도 지지를 보내는 젊은 친구들이 꽤 많다.

 

그러니 모디도 총리를 연임할 수 있었을 터이고.....

 

 

 

이 힌두민족주의가 펼치는 주장이라는 것이,

 

인도의 역사에서 1530~1858년까지 한토막을 차지하고 있는 무굴 제국-이슬람 왕조를

 

인도 역사-힌두/인더스 문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삭제해버린다는 것인데,

 

실제로, 내가 타지마할(무굴제국 황제 샤 자한의 처의 묘) 을 간다고 했을때 "그걸 뭘 보러 가냐" 라는 친구도 있었고,

 

200년동안 식민지배를 했던 영국에 대해서는 아무 감정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래도 영국은 우리를 이슬람에서 해방시켜줬으니까" 라고 대답을 했던 친구도 있었다.

 

 

 

그렇게 이슬람을 인도의 역사에서 침략의 역사로 규정하고 삭제한다고 할 때,

 

그렇다면 힌두 문화의 원류가 되는 아리안(Aryan)족의 침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인도인들, 특히 인두민족주의에서의 생각이 궁금하였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역사적으로 아리안들의 이주와, 이들이 이주하여 만든 베다(Veda) 및 카스트 제도가

 

힌두 문화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침략을 부정하자니 힌두 문화의 근간이 흔들리고,

 

그렇다고 인정하자니 그들의 근간이 외부에서 시작된 침략(혹은 이주)의 역사임을 자인하는 형국이라

 

불편하기는 매한가지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마침 페북에 친구중 한명이 (앞서 그 친구와는 다른) 흥미로운 기사를 올렸다.

 

<당신은 아리안 침략자인가? 피부색에 대한 식민지적 관점이 오늘날 정치적으로 만연해있다.>

 

기사는 한 남부의 정치인이 북쪽의 정치인에게 "아리안 침입자"라고 비난한데에서 시작한다.

 

아리안족 기원설에서는 아리안 침입설 (Arayan Invasion Theory, AIT) / 아리안 이주설(Aryan Migration Theory, AMT)

 

이 있는데, AIT는 식민지 시절 식민지배를 정당하기 위해(아리안족 우월설 식의) 언어학적으로만 본 것이라

 

역사적인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고, AMT는 침입이 아니라 평화롭게 이주/공존했다는 설인데,

 

유전적 연구로 보았을때 지지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론은 아리안족이 이주할(이주했다면) 당시 번성했던 인도의 드라비다 족의 하라파(Harappan) 문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고, 아리안족이 고향에 정착하지 않고 이주할 이유가 없으므로,

 

아리안이라는 종족적 구분은 의미가 없고, 인도는 그당시부터 남북이 하나의 인더스 문화이자 베다(Vedic) 문화로

 

보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는 의견이다.

 

결국 아리아인의 침입/이주설을 부정하고, 그것이 이미 고대 통일된 인도에 내재되어 있었다라는 주장이고,

 

잠시 뒤 이야기하겠지만, 힌두 민족주의/우파의 "아리안"침입/이주에 대한 전형적인 반론이다.

 

 

"아리안(Aryan)"족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 살펴보니,

 

위 기사의 언급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데,

 

우선 19세기에 산스크리트어와 유럽 어족사이의 유사성을 토대로 유럽과 인도의 공통 조상이되는

 

아리아인을 상정한 것은 맞다. 즉 출발이 언어학에서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또한 이 논리가 과거 히틀러의 아리안족의 세계 지배를 정당화하는 식의 인종차별/우월주의적으로

 

활용된 것도 또한 사실이다. 때문에 오늘날에는 특정 인종을 지칭한다기 보다는

 

언어학에서의 어족(인도-유럽어족)으로서의 의미가 더 강하게 통용된다고 한다.

 

다만, 당시 인도의 하라파 문명은 청동기 시대였으나, 베다에는 철기 문화의 언급이 자주 나타나며,

 

베다에 자주 등장하는 말을 타거나, 전차(chariot)를 끄는 모습도 하라파 문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리안인들의 흔적으로, 아리안족 침입/이주설이 단순히 언어적으로만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도 아닌

 

다수 비교 문헌 및 유적등의 발굴과정에서 지지를 받고 있는 이론이라는 점이다.

 

 

 

그러던 중 2018년도에 하버드 대학의 데이빗 리치(David Reich)가 이끈 연구팀이

 

고대인들의 유전정보를 분석하여 아리안족의 이주설을 지지하는 꽤 과학적인 근거를 내놓는데,

 

이로 인해 힌두민족주의의 소위 "아리안 자생설"은 그 근거가 많이 흔들리게 된다.

 

관련된 기사에서 "아리안"을 두고 역사적으로 어떤 입장이 있어왔는지 꽤 재미있게 정리를 했기에,

 

간단히 언급해두고자 한다.

 

The Economist에 실린 <새로운 연구가 인도인의 기원에 대한 소중한 이론에 찬물을 끼얹다>

 

원문은 구독을 해야만 볼 수 있는데, 다행히 한 힌두민족주의자가 데이빗 리치는 사기꾼! 하면서 

 

전문을 옮겨 놓았다.

 

 

1세기 반 전 "인도-유럽-원어(Proto-Indo-European)"에 대한 언어학적 연구와,

 

아리안족의 침입/이주에 대한 이론은,

 

①나치에게는 세계 지배의 정당성을 부여하였고,

 

②영국 식민지배하의 인도에서는 카스트제도와 상위계급의 지배 정당성을 부여하고, (역시 우리가 지배자!)

 

③또 반대로 남인도에서는 드라비다족들의 분리에 대한 주장을 야기하였다. (아리안 침략자!)

 

④한편 힌두민족의자들은 이 이론에 대해 인도의 분열을 노리는 기독교세력과 공산주의자들의 모략이라고

비난하고 "아리안-인도문화의 원류"는 외부에 있지 않고 자생했으며,

이들이 서쪽으로 나아가 서구 문화의 근간이 되었다는 주장을 한다.

(요 지점이 딱 위의 <당신은 아리안 침략자인가?> 가 주장하는 바이다.)

 

 

 

한데 이러한 주장이 데이빗 리치의 연구에 의해 큰 위기를 맞게 되었는데,

 

데이빗 리치의 연구에 대해서는 BBC의 기사에서 꽤 객관적으로 정리를 해놓았다.

 

<고대의 DNA가 인도의 고대사를 다시쓸지도 모른다.>

 

2018년 3월에 출간된 그의 연구에는 세계에서 총 92명의 연구자가 함께 했으며,

 

남아시와와 중앙아시아의 고대 인류의 유해에서 DNA를 분석하였다.

 

이 연구에 따르면 인도에는 두번의 큰 이주가 확인되는데,

 

첫번째는 기원전 7,000~3,000년 사이 이란 서남쪽의 자르고스 지방에서 이주한 농경문화이며,

 

두번째는 기원전 2,000년경 유라시아의 스텝지역에서 이주한 세력이다. 

 

다만 이 연구에서 밝혀낸 점은, 이들이 지금까지 알려진바와 같이 이란 지역이 아닌

 

지금의 카자흐스탄 지방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이다. (그렇다..소련이 세계를 정복한...것이다...)

 

데이빗 리치의 논문중 도판 ①BC7,000년 경 이주, ②BC2,000년경 이주.

 

데이빗 리치의 논문 중 도판 / 녹색 세력이 인도문명의 직접적 조상이다.

 

이 논문은 당연 힌두 민족주의가 득세하던(그리고 지금도) 당시 인도 사회에 꽤 큰 반향을 일으켰고,

 

데이빗 리치를 비롯, 공동 연구자들의 트위터가 테러 당하는 등,

 

힌두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거친 항변이 이어지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객관적인 사실을 조명해야 하는 역사와, 한 나라의 근간과 정당성을 세워야 하는 국사는

 

다소 다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국사에서, "찬란한 우리 반만년 역사"라고 이야기 해야지,

 

"우리 민족은 애초에 쬐끄만 땅덩어리에서 아웅다웅 살아왔어요" 라고 말할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다만, 소위 "국뽕"이 지나쳐 '신화'에서 끝나야 할 것들을 '역사'로 만든다거나,

 

과거의 그릇된 행위들을 정당한 행위로 포장하는(옆 섬나라처럼..) 행위는 당연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중 최악은 자기 생각에 정당하지 못하거나,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거나,국가의 구성원일지라도 - 배제해버리는 행위이다.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들에 의미를 새로이 부여할 수는 있어도

 

그 사건이 발생했었다는 사실 자체는 지워지지 않는다. 

 

 

 

사실 이 논쟁은 인도의 '국사'에 대한 관점에 가까울 것이라

 

외부인인 내가 더 깊게 언급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다만 이미 역사에서 이루어진 것, 그리고 이미 인도의 역사의 일부가 된 것들을

 

그리고 그 후손으로서 현재 인도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을 

 

축출/배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언젠가는 파국적인 사건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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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냐궁
,

 

며칠전 아침신문에 눈길을 끄는 사진이 있었다.

 비접촉식 체온계를 들고 시민의 체온을 측정하는 인도 경찰의 모습.

(인터넷판 신문을 찾아보았으나, 다른 사진이 실려 있어, 해당 사진의 출처는 결국 찾을 수 없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자연스레 너무도 유명한 1968년 에디 에이담스(Eddie Adams)의 <사이공의 처형> 사진이 떠올랐다. 구도나 포즈나, 너무나 유명한 사진이니, 다분히 오늘날의 신문기자가 의도하지 않았을까 싶은 구성이지 싶었다.

 

하지만, 내게 더 흥미로웠던 점은, 두 사진이 권총을(체온계를)겨누고 있는 경찰/군인과

이를 맞는 시민(혹은 베트공)의 구도적인 시각적 유사성과 달리, 내용면에서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었다.

68년의 희생자(?)는 얼굴을 찡그리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반면,

오늘날 인도의 시민은 너무도 당당하게 체온계를, 경찰을 응시하고 있다.

1968년과 2020년이라는 세월을 사이에 두고, 닮은 듯 다른 두 사진을 발견한다는 것은

나를 꽤나 흥분시켰다.

 

이러한 발견은 그리 드문 편은 아닌 것인지, 이라크전 당시 종군기자였던 Sophie Ristelhueiber는 헬기를 타고 이라크 상공을 찍은 전쟁현장의 사진에서, 만레이가 뒤샹의 작품에 내려 앉은 먼지를 찍었던 <Dust Bleeding>을 연상하고 사진이라는 매체가 세상을 보여주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왼편 : <Dust Bleeding>, 만레이, 1920 / 오른편 : <Because of Dust Bleeding>, Sophie Ristelhuiber, 1991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러한 발견을 기쁘게 지인들에게 공유하고자,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리려던 순간,

 잠시 주저할 수 밖에 없었는데, 혹시나, 인도의 지인들이 이 사진을 보고 인도의 공권력에 대한 - 베트남전에서의 즉결처분처럼 - 비판적인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부연설명을 곁들이고, 바이러스와의 싸움 / 이념의 싸움이라는 기본적인 전제가 다르니,

 굳이 그런 불필요한 오해는 하지 않을듯 하여 약간의 부연과 함께 사진을 올렸는데,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우선 한국의 지인이 "저 베트남전 사진의 희생자가 실상 무고한 사람이 아닌 비무장 시민을 학살한 게릴라를 사살하는 사진인데, 사진의 프로파간다가 껄끄러운 측면이 있는건 알고 있느냐" 고 댓글을 달았고, 인도 친구 한명은 "저 사진가가 이 소리를 들으면 까무라치겠는데요?" 라는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사실 다른 인도 친구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는데, 한달에 한번정도 올리는 포스팅에 열렬한 좋아요를 눌러주던 그들을 생각해보면, 분명 이번 포스팅은 거슬리는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위의 지인과도 이야기를 해보고, 다른 인도 친구들과도 이  두 사진의 비교가 그렇게 껄끄러운 구석이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① 대부분은 베트남전의 사진에 대해 모르고 있었고,

 ② 베트남전 사진은 사람이 죽는 사진이고, 인도의 사진은 사람을 돕는 사진인데,

    둘을 비교를 한다는 것은 공감이 가지 않는다.

 

 사실 ②번이 정확히 내가 흥미롭다고 생각한 지점-유사한 형식, 다른 컨텍스트-인데,

 부연설명을 했음에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그 분리가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이유를 추정해보자면, 아마도 부연설명-글을 읽기에 앞서,

 두 이미지의 비교를 통해 아래와 같은 즉각적인 시각적 판독이 일어나는 것 같다.

 

    신문 기사의 사진 : 사람을 돕는 사진   /   베트남전 사진 : 사람을 죽이는 사진

 

 사실 내가 의도한 바는 아래와 같다.

 

   신문기사의 사진 : 총을 겨눈 동작 / 사람을 돕는 사진  / 베트남전 사진 : 총을 겨눈 동작 / 사람을 죽이는 사진.

 

 더불어, 두 사진을 비교하는 내 의도는 역사적 맥락을 걷어내고,

 순전히 그것들의 형식과 내용의 닮음과 다름에서 오는 발견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것이었는데,

 

 두 이미지의 비교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분히 두 사진의 외부의 맥락들,

예를들면 : 베트남전 당시 사진이 전달했던 프로파간다, 인도의 경찰에 대한 대외적인 이미지,

 을 고려하여 두 사진을 비교하고, 의도를 품고 사진을 비교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베트남전의 사진 이미지가 워낙에 강렬하기도 하고,

 또 인도인들은 이 상황의 당사자이다보니 다분히 복잡한 외부의 맥락들 속에서

 사진의 비교를 받아들이게 되고, 일단 한번 이렇게 두개의 사진 비교가 의미화 되면,

 그 이후에 어떤 설명도 처음의 시각적 문법을 뒤집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혹은 읽을 노력 자체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새삼 시각적 문법의 즉각성과 의미 고착의 강력함을 깨달았다.

 

 여기서 딜레마는, 비록 내가 그러한 의도로 올린 것이 아니더라도,

 다수가 나의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을 때, 

 철회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인데, 

 굳이 직접적으로 항의하는 목소리도 없었고,

 또한 당사자들이 아니라 외국인이니까 할 수 있는 비교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양성(?)을 추가하는 차원에서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그리고 결국 소심한 복수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앞서 개인적으로 사진이 불편한지에 대해 물어본 친구들에게는

 충분히 내 의도를 설명을 했고, 대부분은 내 의도를 이해하고,

 굳이 글을 내리거나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고 조언해 주었다.

 

 근데 그렇게 이야기 했던 그중 한명이 결국 뒷통수를 치는데...

 약 6년여간 알고지낸, 나름 친하다면 친한 친구녀석이 있는데,

 약간 힌두 민족주의 / 반중주의 / 친일(?!) 노선을 취하는 친구라,

 종종 힌두우파 테러리즘의 입장에 준하는 글을 보내주기도 하고,

 나는 나대로 질문도 하고, 다소 보편적인 차원의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며,

 나름 그런면에서는 터울없이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친구가 구자라트 지역에서 이슬람 폭동의 역사가 담긴 글을 보내주며

 

 "너는 이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테지만..."

 

 이라고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그게 무슨뜻이니?"

 

 "서구의 자유주의자들은, 모든게 그들(이슬람)에게서 시작되었음은 잊어버리고,

  이슬람을 피해자로 포장하지."

 

 "지금 나보고 그 자유주의자라는 이야기?"

 

 "난 너의 정치성향은 몰라, 하지만 흰것은 희고, 검은 것은 검다고 말해야겠어"

 

 

  나한테 너무 공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냐는 물음에 결국 미안하다고 이야기하긴 했으나,

  

  이것은 분명 상기한 사진 비교에 대한 소심한 복수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였고, 인도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서도 많이 알려준 친구이긴 한데,

  다른 인도 친구들과 교차검증을 해보면 편향이 심하기도 하거니와

  이런식으로 투정을 부릴거라면 관련한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거리를 좀 둘 필요가 있지 싶다.

 

 이상 나름 개인적으로 뿌듯한 발견에서, 시각 문법의 즉각적 독해에 놀라고, 그로 인해 소심한 복수까지 당한 이야기.

 

  

  

 

 

Posted by 냐궁
,

 

<The Darkest Hours>

 

영국이 2차대전에 휘말리던 때의 윈스턴 처칠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개리올드먼이 윈스턴 처칠로 분해 열연을 펼쳤다.

 

작중 언급되는대로 커리어로보자면 재앙에 가까운 처칠이 수상에 오르고,

 

평화협정이라는 카드는 안중에도 없이 독일과의 전쟁이라는 독단적인 선택.

 

역사는 그것이 결과론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고,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긴 하지만,

 

작중에서의 처칠은 그야말로 똥고집으로 가득찬 인물로만 보여지는데....

 

(마지막에 지하철에서 이야기 나누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는 정도..?)

 

히틀러에 대해서는 옳았지만,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는 글쌔...?

 

코로나로 인해 상황이 극단적인 요즘...

 

과연 리더란?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그나저나 릴리 제임스는...정말 이쁘네...

 

 

<What Happend to Monday>

 

무분별한 자원 소모와 기근, 그리고 유전자조작 식물들의 부작용으로 인해

 

산아제한이 실시된 미래에서 7쌍둥이의 투쟁(?)을 그린 영화..

 

볼까말까 하다가 윌리엄 대포에 끌려서....

 

사실상 누미 라파스의 1인 7역 쇼....에 가까운데...

 

(실상 선진국들은 인구절벽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긴 하지만)

 

통제에 대한 주제의식과 적당한 오락성을 버무린 무난한 영화...

 

 

 

 

Posted by 냐궁
,